#1. 울보 괴물의 습격
침대에 누워 단잠을 자고 있는데 어슴푸레 귓가에 막내 딸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평소 같았으면 아직 네살밖에 되지 않은 딸아이의 조그마한 기척에도 벌떡 일어나 달려갔겠지만, 오늘은 밀린 작업으로 밤을 새우다 아침이 환하게 밝아온 새벽에서야 겨우 잠이 들었던 터라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오늘이 며칠이지? 지금이 몇시쯤 된거지?'
나는 쏟아지는 잠을 밀어내려 애쓰며 굳어 버린 머리를 돌리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러면서 귀를 활짝 열어 거실에서 들려오는 딸아이의 울음소리에 섞여 있는 다른소리를 통해 거실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집중했다. 그런 거실에서는 TV소리만 간간히 섞여 들려 올 뿐, 안애(아내를 부르는 개인적인 애칭, 내 안에 있는 사랑이라는 뜻)나 다른 아이들의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딸아이의 울음소리에는 이미 짜증이 섞일 대로 섞여 있었다. 이 정도의 짜증이면 이미 울기 시작한 지가 한참이 지난 것이 분명했다. 아이의 울음소리를 유난히 싫어하는 내 성격 탓에 딸아이가 조금만 울려고 해도 미리 어르고 달래서 이런 상황이 오지 않도록 계속해서 애쓰고 있었는데, 지금 딸아이의 울음소리에는 이미 오랫동안 울고 있는 자신을 달래주지 않는 아빠 엄마를 원망하여서 인지 여태 들어보지 못했던 서러움이 폭발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딸아이의 울음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자니 얼른 거실로 나가 딸아이를 달래주고 싶은 마음 보다는 아직 어린 딸아이를 혼자 방치해 놓은 채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파악이 되지 않는 안애에게 짜증이 났다. 직장에 다니고 있어서 피곤한 것은 알겠지만, 그래도 하루에 몇시간 보지도 못하는 막내 딸아이의 소중한 아침을 이렇게 망쳐 버리다니.
분명 안애도 집 안 어딘서엔가 울음소리를 듣고 있을 것 인데 이 지경이 되도록 도대체 뭐하는 것일까? 설마 아직까지 침대 속에 나와 같은 자세로 누워 있는 것은 아니겠지?
발끝에 걸려 있던 이불을 끌어올려 머리 위로 덮었다. 몸을 돌려 옆으로 눕고는 한쪽 귀는 베갯속으로, 다른 쪽 귀는 팔로 틀어막아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최대한 몸을 움추렸다. 지금 이 상태로 일어나 거실로 나가면 분명 짜증을 참지 못하고 고스란히 누군가에게 전가시키게 될 것만 같아 취한 나름 최선의 방어자세였다.
그렇게 최선의 방어자세로 침대 속에서 뭉그적거리고 있는 중에도 딸아이의 울음소리는 계속해서 내 귓가를 괴롭히고 있었다. 이 정도로 허술한 방어막으로 딸아이의 고주파 울음소리 공력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인 것 같았다. 게다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울음소리는 머리속에서 쌓이며 지금은 마치 바로 옆에서 귀에다 직접 대고 울어대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이미 막내 딸아이는 자신이 조금만 울어도 온 가족이 달려들어 요구사항을 들어주거나 최소한 협상이라도 하려 한다는 것쯤은 아는 네 살이었다. 어떤 육아 프로그램에서 이렇게 떼쓰며 우는 아이는 '스스로 체념하거나 해결책을 찾을 때까지 그냥 울도록 두는 것이 현명하다'라고 했던 내용을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 생각해보니 그렇게 말한 전문가라는 사람은 분명 아이를 키워본 적이 없거나 아이의 이런 울음소리까지는 들어보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듣는 사람에게 이렇게나 짜증 호르몬을 과다 분출시키는 지금의 이 울음소리는 분명 그 전문가도 어쩌지 못할 것이 확실 해 보였다. 아이를 세 명째 키우고 있는 나 조차도 처음 듣는, 그러니까 어쩌면 이 세상에 처음으로 등장한 왕짜증 고주파 울음소리이기 때문이다. 만약 아빠 엄마 짜증 빨리 나게 울기란 유아용 세계대회가 있다면 분명 딸아이가 우승은 맡아 놓은 당상일 것이다.
막내 딸아이는 하필이면 세상에 많고 많은 좋은 능력 중에 왜 이런 기괴한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것일까? 여태껏 언니나 오빠,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능력은 나타난 적이 없었다. 안애에게 이 능력에 대해 아는 것이 있냐고 물어보면 안애는 자신이 준 것은 아니라고 말할 것이 뻔했다. 사실 나의 어린 시절에도 이런 능력에 대한 기억은 없으니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듣다 못한 나의 뇌는 침대에서 일어나 달콤한 잠을 방해하는 저 왕짜증 고주파 울보 괴물을 처단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것도 최대한 빠르게 괴물을 처리 한 후에 침대의 온기가 식기전에 돌아와 달콤한 잠을 이어갈 수 있도록 빛의 속도에 버금가도록 빠른 행동을 요구하였다.
뇌의 명령은 쉽게 거스를 수가 없다. 더군다나 지금처럼 비몽사몽 상태에서의 명령은 이성이나 사랑의 감정도 정상작동이 멈춘 상태라 어떠한 제어장치도 없이 그대로 몸의 각 기관에 빠르게 전달되고 만다.
'용사여 일어나라. 일어나서 저 괴물을 처단하여라.' 아주 간단하고 단순한 명령이었다. 명령이 전달되자 몸의 각 기관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옆으로 엎드린 상태에서 그대로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두 팔이 무거운 상체를 들어 올렸다. 오른발을 들어 침대 밑으로 내려가려는 찰나, 아직 잠이 덜 깬 발은 안전가드에 부딪치며 몸의 중심을 잃게 만들들며 그만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보통 이 정도의 큰 소리라면 안애나 아이들이 '여보 괜찮아요? 아빠 안 아파요?'를 외치며 달려왔을 텐데 막내 딸아이의 울음소리만 잠시 멈칫 거렸을 뿐, 그 누구도 방문을 열고 달려오지는 않았다.
'이 것들이..!' 약간의 짜증이 더해지며 이제는 화가 나기 시작했다. 나의 달콤한 잠을 방해하는 것도 참았는데 침대에서 떨어져도 거들떠도 보지 않는 지금의 이 상황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대로 몸을 일으켜 방문을 확! 하고 열며 거실로 나가고 싶었지만, 이번에는 눈이 떠지지가 않았다. 눈도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눈꺼풀을 들어 올리기 위해 온 힘을 눈에다 집중했다. 다 뜬다고 떠도 크지 않은 넓이인데 그것을 덮은 눈꺼풀은 왜 이렇게 무거운 것일까?
다시 한번 작지만 예리한 눈을 떠보려고 온 힘을 눈에다 집중해 보았지만 무거운 눈꺼풀은 시원하게 들어 올려지지 않았다. 다만 뜨거운 물에 잠깐 들어갔다 나온 조개 입 만큼 공간이 벌어지며 흐릿하긴 해도 사물을 구분할 정도의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제야 문고리를 찾은 나는 방문을 있는 힘 껏 활짝 열어젖혔다.
거실은 이미 대낮처럼 밝았고 아이들의 모습은 눈보다는 귀로 확인되고 있었다. 첫째와 둘째는 막내를 피해 안방에서 TV를 보고 있었고, 문제의 고주파 울보 괴물은 거실의 소파에 누워 아빠의 등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울어대고 있었다. 하지만 안애의 소리는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았다.
이제는 입이 일을 해야 할 차례. 멀지 않은 소파로 걸음을 옮기며 성대에 시동을 걸었다. 이번엔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된다. 괴물을 처단하기 위해서는 기선제압이 필수이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최대 성능을 발휘해야만 했다.
도대에 왜 울어? 왜?! 어?! 아침부터 뭐가 문제야!!
아빠가 떼쓰면 아무것도 안 해준다고 했어? 안 했어?!!
예상보다 큰 목소리에 나의 눈이 깜짝 놀라며 닫혀 있던 눈꺼풀이 확 하고 밀려 올라갔다. 소파에서 고주파 왕짜증 울음소리를 내던 괴물도 깜짝 놀라며 그제야 울음소리를 멈추고 겁에 질린 채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잔뜩 찡그린 얼굴로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되어 발동이 걸려버려서 쉽게 멈추지 않는 울음을 억지로 참기 위해 꺽꺽되는 것이 아침부터 분명 무엇인가가 심기를 단단히 건드린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보자 얼른 다가가 망가진 얼굴을 닦아주며 따듯하게 안아주고 싶었지만, 나의 뇌는 딸아이의 구원의 눈빛을 외면한 채 냉정하게 괴물을 처단할 것을 재촉하고 있었다. 뇌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몸이 고장 나 결국 멀지 않은 미래에 더 큰 파탄이 닥쳐올 것을 예고하며 냉정히 대처할 것을 강요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1~2시간의 수면 만으로는 어제까지 쌓아 놓은 피로를 풀어내는 것이 불가능한 모양이었다.
무섭게 다가오던 아빠가 아주 잠깐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자 괴물은 자신의 본능에 따라 두 번째 고주파 왕짜증 울음소리를 토해내고 말았다. 그것도 아까보다 더 서럽고 큰 고주파 울음소리였다.
순간 망설이던 나를 대신해 나의 뇌는 딸아이의 눈빛을 차단시키며 오른손에게 직접 괴물을 처단할 것을 지시하고 말았다. 나의 오른손은 엉망이 된 얼굴을 닦아주는 대신, 딸아이의 몸을 뒤집어 엉덩이에 찰싹찰싹 매를 날리고 있었고, 나의 입은 아까보다는 조금 작지만 여전히 큰 목소리로,
계속 울 거야? 안 울 거야? 어?! 아빠가 울지 말라고 했지?!
잘못했어?! 안 했어?!!
라고 말하며 괴물을 처단하였다.
그제야 딸아이는 무섭게 변한 아빠의 모습에 몸을 바들바들 떨며 억지로 울음을 삼켜내었고 나는 그런 딸아이를 내버려둔 채 몸을 돌려 방으로 향했다. 방에 들어가기 직전 멀지 감치 떨어져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안애와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사태를 이렇게까지 키운 안애를 날카로운 눈초리로 쏘아보며,
아! 진짜 뭐 하는 거야. 애가 이렇게 우는데??!!
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는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누웠다.
임무를 마치고 무사 복귀한 나의 뇌는 어쩔 수 없었다며 마음을 다독여 주었지만 딸아이의 말랑말랑한 엉덩이 살에 닿았던 오른손은 불쾌한 촉감을 계속해서 전달하려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침대 속으로 들어가 아직 가시지 않은 따듯한 온기와 만난 나의 몸은 금세 숙면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정신이 점점 흐릿해져 갈 때쯤 딸아이를 달래는 안애와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2. 오른손의 망각
띵동 띵동 ~
좀처럼 울리지 않던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침대에 누워 있던 그 순간 본능적으로 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분명 택배일 것이다. 어제까지 눈 빠지게 기다렸던 바로 그 택배. 몸을 빠르게 일으키며 문밖을 향해 '나가요!'라고 큰 소리로 대꾸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아직 잠이 덜 깬 모양이었다.
침대에서 나와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서자 아랫도리가 시원한 것이 뭔가 허전했다. '아차! 바지!' 하마터면 속옷만 입고 문을 열 뻔했다. 이렇게 정신이 없다니! 다시 방으로 들어가 이불속에 아무렇게나 벗어두었던 바지를 찾아 입고 현관으로 달려갔다.
네! 누구세요?
문을 열며 동시에 말을 했다.
하지만 열린 문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썰렁한 한기만 집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이제 겨울이 얼마 남지 않은 모양이다. 당황하여 텅 빈 복도를 멍하니 바라보다 주변을 둘러보니 현관문 옆에 커다란 박스가 놓여 있었다.
'그럼 그렇지.' 언제나 나의 감은 틀린 적이 없다. 택배 상자를 들어 거실로 들어다 놓고는 소파에 털썩하고 주저앉았다.
어찌 된 영문인지 요즘 택배 아저씨들은 도통 얼굴을 볼 수가 없다. 택배가 아저씨들이 주는 선물은 아닐지라도 최소한 얼굴을 보며 전달해 준다면 내 마음속 택배에 대한 기쁨을 잘 배달해 준 고마움으로 대신 받아갈 수 있을 텐데 좀처럼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아무리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진짜 산타할아버지가 되고 싶은 건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 보니 커피가 당겼다. 주방으로 가 전기 주전자에 스위치를 켰다. 전원을 누르면 아쿠아 블루의 파란색이 투명창에 들어와 괜히 멋있어 보이는 주전자이다. 그리고 베란다로 나가 다비도프 한 가치를 꺼내 불을 붙였다. 시원한 바람과 함께 담배연기를 폐 속으로 깊게 빨아들이고는 길게 내뱉었다. 몸을 난간에 밀착시키고 팔은 난간에 올려 기대어 놓은 채였다.
두 손가락으로 타들어가는 하얀색 담배를 가만히 쥐고 있는 오른손이 보였다. 갑자기 수십 년 동안이나 이렇게 들고 있었을 오른손이 못생겨 보였다. 분명 똑같은 모양, 똑같은 자세로 들고 있었을 텐데 오늘의 오른손은 왠지 거무튀튀하고 주름도 깊게 파인 주름이 도드라져 보였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꽤 차가워진 날씨에도 불구하고 가을 하늘은 유난히 높고 파랗게 보였다.
'겨울의 하늘도 이렇게 파랗던가?' 겨울이 지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았는데 겨울의 하늘이 기억나지 않는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더니 진짜인가 보다.
주방으로 돌아와 커피에 물을 부으며 시계를 보았다.
오후 1시!!
나는 깜짝 놀라 스마트폰을 찾아 전원을 켰다. 하지만 액정에 표시된 시간도 역시 1시 03분이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깊은 한 숨이 굳게 닫혀있던 입술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하~.
육아휴직을 한 지 3개월이 지났지만 나는 단 한 번도 이 시간까지 잠을 잔적이 없었다. 유난히 일찍 일어나는 아이들이 늦잠을 잘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주지 않았던 것도 있지만 나조차도 나태해질 내 모습이 두려워 항상 안애와 아이들의 상큼한 아침을 만들어 주기로 다짐을 했었기 때문이었다.
지난 3개월 동안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나름의 사투를 벌여왔었는데, 오늘 그 다짐이 깨져 버린 것이다. 물론 3개월 동안 모든 날이 완벽했던 것은 아니었다. 안애가 아침을 준비하는 날도 많았고, 아이들의 물건을 빠트리고 보내어 다시 가져다 주기도 했었다. 하지만 오늘처럼 안애와 아이들이 집을 나서는 순간도 기억을 못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언제나 집을 나서는 안애와 아이들에게 '잘 다녀와'라는 인사를 건네기는 했었는데 오늘은 그러지 못한 것이다.
'이렇게 게을러질 바에야 오늘 받은 택배 상자 속 스피닝 자전거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홈쇼핑 호스트의 설명에 혹해서 안애와 나의 건강을 챙겨보겠다며 몇 날 며칠을 고민하여 주문한 제품인데 이런 식의 생활패턴이 유지된다면 운동을 해봐야 건강해질 것 같지가 않았다. 뭐든지 한 번 하기가 어렵지 한 번 뚫려 버린 물고는 쉽게 막아지지 않는다. 그것이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간에. 이런 상황을 만들어 버린 나 스스로가 너무 한심해 견딜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지금의 상황을 만회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다. 그러려면 아직 완전히 깨어나지 않은 세포들을 깨워야만 할 것 같았다. 커피 한 모금을 입에 가져가 목구멍으로 넘겼다. 뜨거운 카페인이 식도를 따라 내려가며 잠들었던 세포들을 깨워댔다. 니코틴과 카페인의 조합은 잠든 세포를 깨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주술이다. 각각의 능력도 뛰어나지만 둘이 합쳐지면 그 능력은 배가 넘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제 곧 모든 세포가 깨어날 수 있으리라. 세포들이 깨어나면 지금의 이 한심한 느낌을 어떻게든 지우고 싶었다.
그렇게 후회와 자책의 커피를 세 모금쯤 마셨을 때, 전화기가 울렸다. 안애였다.
"일어났어?"
"응"
미안한 마음이 한가득이었지만, 난 굳이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며 말했다.
아침엔 다들 잘 갔어?
내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안애는 아침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 안애의 이야기는 뭔가가 이상했다. 내가 늦게 일어나 자신이 고생했다는 푸념이나 나에 대한 원망과 질책이 날아올 줄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안애는 미안하다며 운을 뗐다.
막내가 울게 된 이유부터 자신이 달래도 소용이 없었다는 이야기까지. 어제 늦게 잠든 것 같아 깨우고 싶지 않았는데, 미안하게 되었다며 안애는 되레 나에게 용서를 구하고 있었다. 아이스크림이 문제라고 했다. 새벽 댓바람부터 어제 산 아이스크림을 먹겠다며 떼를 쓰고는 어떻게 손을 쓸 사이도 없이 바로 괴물로 변해버렸다고 말이다.
그제야 나는 어제 아이들과 함께 갔던 이마트 계산대에서 계산도 전에 아이스크림을 뜯어 달라고 생떼를 쓰던 막내 딸아이의 모습과 오늘 아침 울보 괴물을 처단했던 순간까지가 모두가 기억이 났다. 나는 오늘 아침 못생긴 오른손으로 괴물을 처단했던 것이었다.
아.. 맞다. 아침에 내가 막내를 때렸었구나. 기억났다.
아.. 맘이 안 좋네..
잠결이었었지만 나의 오른손이 했던 일.
정확히 몇 번을 어떤 강도로 공격했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딸아이의 말랑말랑한 엉덩이에 닿았던 불쾌한 촉감이 떠올랐다.
아냐 여보. 첫째랑 둘째 때도 당신이 이렇게 떼쓰던 애들을 잘 타일렀었잖아.
분명 이맘때는 이런 게 필요한 것 같아. 그러니까 너무 마음 쓰지 말아요. 알았지?
얼른 밥 먹고 할 것 해요. 밥 굶지 말고요.
나는 끊겨버린 전화기를 손에 들고 한참이나 그대로 있었다. 전화기를 들고 있는 손 역시 오른손이었다.
이 오른손은 도대체 무슨 짓을 벌이며 살아온 것일까?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일들을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잊어버리고 살아온 것일까?
오른손의 다른 이름은 바른손인데 과연 내 오른손은 바른 일들을 하고 살고 있는 것이 맞는지 궁금해졌다.
안애의 위로가 나름 위안이 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나의 오른손을 용서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동안 벌여온 많은 일들을 망각이라는 그늘에 숨겨 놓은 채 주인을 속이며 아무렇지도 않게 정상 인척 생활하는 이 모습이 나는 무서웠다. 먼 훗날 그 피해자 들은 분명 주인인 날 찾아와 오른손의 책임을 물을 것이다. 그때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 까? '오른손이 한 일이니 나는 모르는 일이다.'라고 딱 잡아떼며 모른 척할 수 있을까? 그 들의 고통을 모른 척할 수 있을까?
가만히 오른손을 내려다보며 그동안 숨겨놨을 법한 피해자들을 떠 올려 보았다. 커피를 또 따르고, 담배를 두대나 더 피웠다. 그동안 오른손은 잠시 묶어두고는 잘 쓰지 않는 왼손만을 사용했다. 오른손은 오롯이 생각에만 전념시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도 오늘 아침 피해자인 막내딸 밖에는 생각이 나질 않았다. 오른손을 꼬집어 보았다. 이대로 그냥 두면 영원히 잊힐 피해자들을 실토하게 만들어 찾아가 용서를 구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꼬집힌 오른손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동안 혹사당하며 살아온 세월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는 듯 지금의 달콤한 휴식을 즐기기까지 하였다.
이대로 두면 분명 내가 뒤집어쓸 것이 뻔했다. 이번엔 아까보다 훨씬 세게 꼬집어 보았다. 손바닥으로 세게 오른손등을 내리치기까지 했다. 이번엔 효과가 있었다. 꼬집히고 맞은 살갗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심지어 꼬집힌 자리는 살갗도 살짝 벗겨진 것 같았다. 아파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것도 심하게 아파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오른손은 꿈쩍도 하지 않은 채 바들바들 떨고만 있었다. 분해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오른손이 아파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프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당연하고 간단한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오른손에 대한 잘못을 파악해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겠다는 말도 안 되는 논리로 나는 오른손에게 상처를 주고 있었다.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아야 된다는 오만하고 불결한 생각이 바로 내가 내리고 있음을 깨닫고 만 것이다.
그 순간 나는 아무것도 못하고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그것도 한참 동안이나.
잘못을 한 오른손을 꼬집었지만 아픈 것은 나였다.
#3. 또, 다시, 손을 잡고..
네시가 조금 넘어 나는 평소보다 조금 일찍 막내 딸아이를 데리러 어린이집으로 향했다. 이번 주 들어 가장 빠른 시간이다. 어린이집으로 향하는 골목길에 들어서자 햇살이 정면에서 비추어 똑바로 눈을 뜨고 앞을 쳐다볼 수 없을 정도였다. 굉장히 눈이 부셨지만 전혀 싫지 않은 느낌이, 굉장히 밝고 따뜻하여 뭔가 포근함을 간직한 그런 느낌을 전해주는 찬란한 햇빛이었다.
어린이집 문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눌렀을 때 혹시 막내 딸아이가 '아빠 싫어!라고 말하며 안 나오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을 열고 나의 얼굴을 확인 한 선생님이 딸아이의 이름을 크게 부르며 안으로 사라지자 그 걱정은 더욱 커져 혹시 진짜로 그렇게 되더라도 놀라지 말고 스스로를 다잡으며 심호흡을 크게 한번 했다.
잠시 후 가방을 멘 딸아이가 방에서 나와 현관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주저 없이,
아빠! 하며 두 팔을 벌리고 뛰어와 내 품에 안겼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내가 이 아이의 아빠라서,
그렇게 불릴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를 처음으로 느꼈다.
그리고 이 아이를 안을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커다란 축복인지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잠시 동안 서로를 않고 있었다. 하지만 금세 내 품이 갑갑해진 딸아이는 손으로 나를 밀쳐내고는
신발을 신겨달라며 재촉했다. 그렇게 우리는 짧은 화해(?)의 포옹을 하고는 일상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딸아이에게 물었다.
딸. 오늘 어린이집에서 재밌었어? 뭐하고 놀았어?
응. 수정이랑, 지현이랑 놀았어. 효주랑도 놀았어.
사실은 아침에 있었던 일에 대해 물어보고 사과하고 싶었지만, 괜히 딸아이가 기억해서 관계가 서먹해지면 곤란할 것 같아 그 얘기는 묻지 못했다. 대신에 나는,
딸. 아빠가 오늘 킨더 사줄까?
진짜? 응!
그럼 우리 킨더 사러 가자~
와~ 그래. 아빠 좋아~
하며 신나 하는 딸아이의 얼굴을 보고는 덩달아 활짝 웃었다.
아주 잠깐은 딸아이가 왠지 유독 좋아하는 듯 한 착각이 들기도 했었다. 꼭 무엇인가를 알고 행동하는 사람처럼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이 좋아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은 어린 네 살 일 뿐이라며 깊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니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 딸아이의 웃는 얼굴을,
햇살보다도 더 밝게 웃음 지을 수 있는 딸아이와의 지금 이 순간을
영원히 간직하며 살고 싶었나 보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보고 웃고 떠들며
서로의 손을 꼭 잡고는
편의점을 향해 걸었다.
'창작글 > 에쎄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에세이) #10. 불혹의 나이에 박태환 따라잡기 (0) | 2020.03.22 |
---|---|
에세이) #9. 법륜스님의 말씀이 절실한 날 (0) | 2020.03.22 |
에세이) #7. 조급한 마음 내려 놓기 (0) | 2020.03.22 |
에세이) #6. 혼자이지만 혼자가 아닌 삶 속에서 (0) | 2020.03.22 |
에쎄이) #5. 어쩌면 슬럼프를 극복하는 가장 빠른 방법 (0) | 2020.03.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