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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글/에쎄이

에세이) #10. 불혹의 나이에 박태환 따라잡기

by 바꿔33 2020. 3. 22.

 

 중학교 2학년 그러니까 내 나이 15살이 되던 해에 있었던 일이다. 린시절의 나에겐 어둠이 가장 큰 공포였다. 전설의 고향이 유행했던  그 시절, 안보면 될 것을 꼭 이불을 뒤집어 쓰고 '내다리 내놔'를 외치던 귀신들을 끝까지 본 탓이 분명했다. 닭이 울어 날이 밝으면 귀신들은 물러갔고 날이 저물면 다시 나타났다. 어둠이 귀신을 나타나게 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어둠이 내리면 당장에라도 귀신이 튀어나올 것만 같아 밖에 나갈 엄두도 못냈다. 어두운 방에 불을 키러 들어가는 것 조차도 무서웠다. 불을 켜려는 순간 무엇인가 내 팔을 그대로 잡아당겨 어두운 방 한가운데로 끌고 들어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둠에 대한 공포는 중학생이 되어서도 계속되었다. 그 정도는 많이 약해져 어두운 골목을 뛰어서 지날 정도는 되었지만, 뛰는 내내 '아아악'하고 소리를 지르는 일이 다반사였다. 특히 우리집은 골목길에 있어서 집으로 가기위해서는 꼭 골목길의 어둠을 지나야만 했는데, 골목길 중간의 가로등이라도 망가진 날에는 여지없이 비명이 튀어나왔다. 

 그러던 어느날 여느때와 다름없이 친구들과 늦게까지 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요즘들어 자주 깜빡거리는 가로등이 신경이 쓰였던 터라 골목길 앞에서 가로등 상태부터 점검을 했다. 불이 꺼져 있다면 사람이 지나갈때까지 기다렸다 들어갈 심산이었다. 그러나 환하게 골목길을 밝히는 가로등에 괜한 걱정을 했다며 골목길을 성큼성큼 내딛고 있었다. 골목길에 완전히 접어들어 가로등 밑을 지나고 있을때 쯤이었다. 팟! 하는 소리와 함께 주변이 온통 씨컴한 어둠으로 뒤덥혀 버렸다. 순간 나는 미동조차 하지 못한채 그 자리에서 그대로 얼어버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몸속 깊은 곳에서 '살려주세요'라는 말을 외치고 있었지만, 입 밖으로 내보내지는 못했다.


깊은 정적과 어둠. 숨막히는 고통의 연속.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내 눈이 조금씩 어둠속의 물체들을 구분해내고 있었다. 오래된 담벼락과 진영이형네집 철재 대문, 길가에 피어 있던 이름 모를 꽃과 잡초들, 그 사이에 삐죽 솟아 있는 가로등과 전봇대도 모두 그대로였다. 담벼락위에도, 지붕위에도, 심지어 내 등뒤에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텅빈 골목길이 있을 뿐, 내가 염려하던 그 어떤 것도 그곳에는 없었다. 

 그 후로 불꺼진 골목길을 그대로 지나려는 몇번의 시도와 노력 끝에, 어둠은 공포가 아니라 해가 지면서 찾아오는 자연현상이며 달빛도 꽤 밝다는 사실과 밤하늘에 빛나는 별빛은 참 예쁘다라는 지극히 당연한 자연의 섭리를 깨달을 수 있었다. 어두운 골목길 한복판에서도 어떤 공포도 느끼지 않게 되었을 때 쯤, '이제 나도 어른이 되었나보다'라는 생각과 함께 가슴속에는 묘한 흥분과 쾌감을 느꼈다. 공포와 정면으로 맞서 이겨내었다는 승리자의 감정이 분명했다.



 불혹을 바라보는 요즘 나는 또 하나의 공포를 떨쳐내고자 도전을 한다.

 

그것은 바로 물에 대한 공포이다. 

 취학전 무르팍 얹저리 깊이의 얕은 웅덩이에 빠졌던 사건과 초등학교 시절 2m 깊이의 어른용 풀에 들어갔다 살기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 쳐야 했던 사건 등 물에 대한 공포는 나에게 차고도 넘치는, 절대 깰 수 없는 게임의 끝판왕쯤 된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생사의 고비를 몇번이나 넘었던 나는 결국 튜브나 구명조끼의 도움을 받아도 발이 땅에 닿지 않으면 죽음의 공포가 밀려왔다. 튜브에 구멍이 나거나 빌려입은 구명조끼가 너무 커 내 몸에 맞지 않아 물속으로 얼굴이 잠겨버릴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물에 빠지면 코와 입을 통해서 계속해서 흘러 들어오는 물의 맛은 마셔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알 수가 없다. 그 비릿하고 미지근한 물 맛.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지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물 맛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물을 피해서만 살수는 없는 일이다. 

 

 내 몸 하나 쯤이야 '물놀이는 재미없어' 라고 생각하며 물가를 피해 살기만 했어도 충분히 지킬수가 있었다. 물놀이가 재미있긴 하지만 인생에서 그깟 재미 하나쯤 포기하고 산다고 해서 크게 손해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누구도 세상의 모든 재미와 기쁨을 전부 누리고 사는 사람은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내 아이들은 이야기가 다르다. 아버지가 되어 아이들을 바라보니 이것저것 알려주고 싶은 것도 많고 해주고 싶은 것은 더욱 많다. 

 

 아빠 없이 자랐던 유년시절, 내가 받지 못한 사랑을 내 아이들에게는 주고 싶은 보상심리가 더욱 부추기는 것 같다. 아이들은 나보다 나은 삶을 뛰어넘어 사회 통념상에서도 훌륭한 아이로 키우고 싶은 것이 지금의 심정이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보다는 세상의 이치에 현명하게 대처 할 줄 아는 아이로 말이다. 두려움을 피하기 보다는 맞서 싸울줄 아는 아이. 두려움을 극복했을 때 얻어지는 흥분과 기쁨을 아는 그런 아이로 말이다. 

 

유명한 노인과 바다에서 고기를 잡아주기 보다는 고기 잡는법을 알려주라고 하지 않았던가. 

 

 수영강습에 보내어 간단한 방법으로 수영을 가르칠 수도 있지만, 뭔 훗날 우리 아이들 중 박태환이나 펠프스 처럼 훌륭한 수영선수가 나왔을때 인터뷰에서 어릴적 수영강사를 은사로 꼽는다면 왠지 슬플것만 같다. 박세리의 우승소감에서 아버지에 대한 감사표시가 얼마나 감동적인지 우리들은 다 알고 있지 않은가. 

 

 내 아이들의 소중한 기억속에 아빠가 되도록 많이 자리잡게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먼 훗날 어떤 시상식에서 우승소감속에 아빠에 대한 이야기가 꼭 나왔으면 하는 욕심도 부리고 있다. 얼마만큼의 욕심을 더 부릴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앞으로 10년은 더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부디 이 작은 소망이 이루어 질 수 있도록 이 세상 모든 만물이 도움을 주기를 간절히 기도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