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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글/에쎄이

에세이) #4. 괜찮아. 잘 하고 있어.

by 바꿔33 2020. 3. 20.
작업실 야경 by 홍글

 

글을 쓰기 시작한 후 첫번째 슬럼프가 찾아왔다. 평소처럼 똑같이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한글을 실행했을 뿐이었다. 커서가 깜빡이고 키보드에 손을 얹어 뭔가를 두드리려는데 아무런 단어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멍하니 십여분.

정신을 차리고 해야 할 일들을 떠올렸다. 쓰고 있는 소설의 퇴고가 가장 급했다. 파일을 찾아 열고나니 수정해야 할 부분이 보였다. 그렇게 일이 시작되는 듯 했는데, 얼마 못가 또다시 멈춰버린 손. 진도도 더뎠고, 그나마 수정한 부분도 맘에 들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시원한 물도 마시고, 담배도 피워물었다. 물을 끓이고 커다란 머그컵에 모카골드 믹스커피를 2봉이나 뜯어 넣었다. 창밖을 보며 하얗게 비워진 머리를 또 비웠다. 아니 비우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비우려고 노력했던 머리속엔 니코틴과 카페인대신 "걱정"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내가 이 짓을 왜 하려고 하는거지?'
'성과도 없는 이 짓을 언제까지 해야 할까?'
'이대로 계속가면 그 끝엔 뭐가 있을까?'

허무와 두려움.

작은 틈새 사이로 들어온 그것은 비워진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할 수 없이 잠을 청했다. 남겨진 체력은 숙면을 방해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낮에 일이나 더 열심히 할 걸. 그렇게 뒤척이다 겨우 잠들었다.

기와위의 초록 by 홍글



새벽 4시. 잠을 설친 탓에 몸이 상쾌할리 없다. 컴퓨터의 전원버튼을 억지로 눌러 블루 스크린이 떠 버린 것 처럼, 내 몸과 마음도 온통 바이러스 투성이다. 듣지 않는 마우스대신 불편한 키보드를 두드려 재부팅을 선택하고 엔터.

다행히 몸을 일으켜 책상 앞에 앉는다. 그리고 랩탑의 전원버튼. 다시 마주한 커서는 이번에도 움직이지 않는다.

'버티자. 글이 써 질때까지!'

그렇게 가만히 시간을 보냈다. 새벽의 어둠은 생각보다 깊다. 출근시간을 알리는 알람소리에 맞춰 출근을 준비한다. 이미 엉망이 된 아침은 쉽사리 진정되지 않는다.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오전을 지나 오후가 되었을 때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 글이 안써져."

"으이구! 괜찮아! 잘 하고 있어!"

갑자기 들어온 300만 볼트짜리 전기가 끊어졌던 퓨즈를 이어붙였다. 온 몸에 짜릿짜릿한 전기가 흐르고 모든 감각이 다시 깨어났다. 그러자 웃음이 났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아내는 또 한 번 이야기한다.

"괜찮다니까. 지금도 잘 하고 있어. 글쓰는 게 쉬울 줄 알았어? 그래도 힘들면 안써도 되잖아? 그러니까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마!"

무슨 심보인지 하지 말라고 하니 더 하고 싶어진다. 다물어진 입술을 더 깨물어 어금니끼리 닫게 만드니 없었던 굳은 의지가 생겨나는 것 같다. 나의 온전한 선택이었으니, 그 끝은 봐야겠다 싶다.

굳었던 마음이, 걱정으로 가득찼던 머리가 한결 가벼워졌다. 오늘은 작업실 대신 집으로 가야겠다. 그리고 쑥스럽지만 따듯하게 안아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