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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글/단편소설

단편) #6. 빗소리

by 바꿔33 2020. 4. 11.

 

TV 좀 꺼봐 여보. 빗소리 좀 들어보게.

 

 그녀의 말에 나는 책상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던 리모컨을 들어 소리를 무음으로 돌렸다. TV에는 유튜브에서 밤에 듣기 좋은 클래식이라는 제목의 동영상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바이올린과 몇몇 악기들이 어우러진 감미롭고 부드러운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화면엔 멋들어진 나무 두 그루가 서 있는 노랗게 석양이 진 호숫가에 하얀 눈이 내리고 있는 장면이 계속해서 떠 있었다. 음악소리가 잦아들자 빗소리가 더욱 크게 들려왔다. 베란다 문을 다 닫아 놓은 상태에서는 빗소리가 이렇게 크게 들린 적이 없었는데 오늘은 누군가 밖에다 천막을 쳐 놓은 것 마냥 투두둑거리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좋네~

소파에 한껏 움크리고 누워있던 그녀가 몸을 반대쪽으로 뒤척거리며 나지막한 소리로 이야기했다.

뭐가 좋다는 이야기 일까? 빗소리일까? 아니면 새벽에 빗소리를 같이 듣고 있는 상황일까? 그것도 아니면 자신의 요구에 즉각 반응을 해준 나의 행동이 좋다는 말일까? 무엇이 좋은 것이냐고 물어보고 싶지만, 소파 깊숙이 뒤돌아 누운 그녀의 휴식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그냥 참기로 했다. 분명 물어보면 어설픈 개그에 그녀의 아름다운 미소를 볼 수 있을 테지만 나의 작은 욕심으로 그녀의 피곤을 가중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투두 두두둑 후두 두두 룩

 꽤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빗소리는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이 정도의 빗방울이면 꽤 많은 양이 오고 있을 터인데 일기예보에서는 어째서 이 정도의 비가 온다는 것도 맞추지 못하는 걸까? 몇 년 전 일기예보의 부정확성 때문에 크게 이슈가 되어 관련 장비 구입에 관한 비리가 있었다는 기사를 접했던 것 같은데 아직도 이렇게 부정확한 것을 보면 분명 그때 수사가 너무 허술하여 꼬리 자르기 식의 임시처방만 이루어진 것이 분명한 것 같다. 

 쓸데없는 생각으로 약간의 시간을 사용했더니 이미 그녀는 소파에서 미동도 않고 잠에 빠져버렸다. 환하게 밝혀진 주방의 조명이 꽤 거슬릴만한 상황일 텐데도 나에게 조금의 핀잔이나 불편한 기색도 비치지 않은 채 잠들은 그녀의 뒷모습은 내가 그녀를 사랑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수많은 요소 중에 한 가지이다. 어떠한 상황이 와도 내 기분을 먼저 배려하는 그녀의 배려심에 감동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무뚝뚝한 성격 탓에 그녀에게 매번 표현을 하지는 못하지만 가슴속 깊이 머리 숙여 감사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절대적인 지원과 사랑으로 가득 찬 그녀의 눈빛과 표정은 나를 힘차게 살아가게 하는 가장 큰 원동력이 된 지 오래다. 이따금씩 그 배려가 부담스러워 퉁퉁거리기도 하고 짖꿎게 무관심이 아니냐며 따져 묻기도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부족함이 만들어내는 사랑에 대한 확인의 절차일 뿐 그 어떤 의심이나 불만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런 나의 부족함에 그녀가 눈물을 보일 정도로 많이 힘들어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지만 매번 다짐은 시간이 지날수록 잊혀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금 눈물을 보고야 만다. 

 연애시절 그녀는 나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수십 번 아니 수백 수천번이나 했다. 5급 행시를 준비하던 그녀였기에, 우리 과에서는 첫 번째로 붙을 거라던 교수님과 선배님들의 기대와 촉망을 한 몸에 받던 몸이었기에 더욱이 그 스트레스는 배가 되어 스스로를 괴롭히던 그녀였기에 아무리 잔인한 말로 내 가슴에 상처를 남겨도 묵묵히 받아내곤 했었다. 

 

 그렇다고 늘 스트레스 때문에 헤어지자고 했었던 것은 아니었다. 진심으로 헤어지자고 얘기했던 적이 훨씬 더 많았다. 하지만 그 수많은 칼날을 뚫고 꿋꿋이 버텨낼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칼날 같은 말들에 가슴이 너덜너덜해져 더 이상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다쳐도 그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난 가슴이 아니라 온 몸으로 심한 거부 증상이 찾아오곤 했었다. 머릿속은 텅 비어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고, 손과 발은 목적을 잃고 축 늘어져 움직이지 않았으며 몸속의 장기들조차 제 역할을 못해 음식을 토해내거나 숨이 쉬어지지 않은 적도 많았다. 

 

 이런 현상에 비하면 가슴의 상처 자국 몇 개쯤은 나에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죽지 않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 같은 것 말이다. 그것에 비하면 그녀가 나에게 보였던 몇 번의 눈물은 조족지혈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미미한 것일지도 모른다. 난 피눈물을 수십 번씩이나 가슴에 묻고 살아왔으니까. 그렇지만 이렇게 복수하는 것은 너무나도 유치해 그러지 않으려고 한다. 가끔씩 그녀가 흘리는 눈물 또한 그때의 복수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다. 

그저 지금 잠든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 그 하나만으로도 나는 더없이 행복하고 감사하다. 그런 나의 마음을 그녀가 조금이라도 알아줬으면 하는 바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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