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창작글/장편 & 시나리오

소설) 원더랜드 3화

by 바꿔33 2020. 4. 11.

 새벽거리를 걸어 기차역에 도착하니 하늘은 환하게 밝아져 있었다. 시간을 보기위해 시계를 찾았지만 광장 어디에도 시계는 보이지 않았다. 뭔가 이상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분명 광장 한 가운데 서 있어야 할 시계탑이 없었다. 옛날 광장 중앙에는 커다란 시계탑이 세워져 있어 사람들의 만남의 장소로 애용했었는데, 넓은 광장 어디에도 시계탑은 보이지 않았다. 할머니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날벼락 맞을 놈들. 세금 걷어가서 다 어따 쓰누. 멀쩡한 걸 없애긴 왜 없애.’

 작년 여름 오래된 역사를 새로 짖는다며 그렇게 떠들어대더니 겉모습만 번질나게 해 놓았다. 오래된 것들 중 못쓰게 된 것들을 새롭게 바꾸는 것은 이해를 하겠지만, 멀쩡한 것들까지 바꾸는 것은 이해가 안 되었다. 할머니는 습관적으로 바지춤에 넣어둔 핸드폰을 꺼냈다. 작년에 막내아들이 바꿔준 흰색 폴더 전화기다. 막내아들 말로는 최신 전화기 기능도 있다고 했는데, 할머니는 당최 신경 쓰지 않았다. 전화기야 전화만 잘되고 시간만 잘 가면 그만이다. 폴더를 열고 화면을 보니 전화기가 꺼져 있었다. 집을 나오면서 전화기를 꺼 놓은 것을 깜빡한 것이다. 할머니의 미간이 또다시 찌푸려졌다. ‘나도 오래되긴 됐나보네. 금방 한 일도 이렇게 잊어버리니. 저 시계탑처럼 나도 없어져야 될랑가보다.’

 

 전 보다 더 커진 역사는 2층이라 계단이 엄청 많았지만,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되어 있었다. 2층에 도착하니 휑하던 광장과는 달리 여러 상점이 있었다. 그 중에는 이 새벽에 문을 연 부지런한 가게도 있었다. 사람들은 누가 쫒아오기라도 하듯 모두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몇 년 전부터 여기저기 집을 짓기 시작하더니 서울사람들이 몰려와 집값이 많이 올랐다는 얘기는 할머니도 들었다. 그 때문에 이 역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었다. 아무리 기차가 빨라졌다고 해도 두 시간은 걸릴 텐데, 요즘 세대도 고생스럽게 살긴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할머니도 돈만 벌게 해 준다면 거리랑 상관없이 쫓아다니곤 했었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어디 밥 먹고 사는 게 쉬운 적이 있던가.’하고 할머니는 생각했다.

 기차표를 사기 위해 매표소를 찾았다. 각 종 표지판과 전광판이 번쩍이고 있어서 할머니는 정신이 없었다. 결국 지나가는 젊은 사람에게 물어보니 친절하게 가르쳐주었다. 매표소 앞은 한산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표를 살 필요가 없는 모양이었다.

어디가세요?”

. 나 친구네 집에 가려고.”

 무심히 화면을 바라보던 젊은 여직원이 천천히 얼굴을 들어 할머니를 쳐다보았다.

아니요. 할머니. 어디까지 가시냐고요?!”

? ~.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나 대천가는 표 한 장 줘요.”

 여직원이 건네는 표를 받아 들고 할머니는 멋 적게 웃어보였지만 여직원은 무심했다. 살짝 기분이 나빴지만 할머니는 내색하지는 않았다.

할머니. 전철 타는 곳이랑 헷갈리시면 안돼요. 쭉 가셔서 복도 맨 끝에서 내려가서 타셔야 돼요. 아셨죠?”

복도 끝에 가서 타라고? . 알았어. 고마워.”

 

 

 

 기차를 타러 승강장까지 가는 길은 꽤 복잡했다. 복도 끝에 오는 동안 내려가는 통로가 네 군대나 되었다. 만약 아가씨가 얘기해 주지 않았다면 분명 한참이나 헤맸을 것이다. 마음속은 착한 아가씨라고 생각하며 승강장에서 조금 기다리니 기차가 왔다. 기차에 올라 차표에 적혀 있는 자리를 찾았다. 기차 안은 생각보다 한산했다. 자리에 도착하니 옆자리도 비었다. 할머니는 가방을 왼쪽에 올려놓고 창가에 털썩 앉았다.

어이쿠. 이제야 좀 쉬겠네

 할머니는 자기도 모르게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몇 년 전만 해도 이 정도 걷는 것은 일도 아니었는데, 이제는 몸이 정말 예전 같지 않았다. 특별히 아픈 곳은 없었지만 체력이 많이 떨어진 것 같았다. 할머니는 다리를 주물거리며 창밖을 보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역사는 밖에서 봤을 때보다도 더 커 보였다. 역사가 없으면 할머니 동네가 보일 것 같았다. 하지만 보인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냈다. 화면을 열고 꺼진 전화기를 켜 혹시 전화가 온 것이 있나 확인을 하고 싶었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괜히 마음만 약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큰 아들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을게 뻔하다. 큰 아들 황소고집이야 제 아비를 닮았을 테니, 이 정도로 흔들릴리 없었다. 그래도 둘째 딸에게는 전화를 해야 하는 건 아닌가?, 하고 생각했지만 할머니는 그것도 나중으로 미뤘다.

 덜컹하고 열차가 출발하자 창밖의 풍경이 느리게 바뀌기 시작했다. 이제는 내릴 수도 없었다. 할머니는 괜히 설레였다. 이렇게 혼자서 어디를 가보는 것이 얼마만이지 몰랐다. 마지막으로 혼자 어디를 가 본 것이 언제인지 생각도 나지 않았다. 언제나 애들과 함께 거나 그렇지 않으면 동네 아줌마들과 함께갔던 여행이 전부였다. 아이들 차를 이용하는 것보다 조금 불편하기 하지만, 마음만은 훨씬 더 편했다. 시끄러운 손주들도, 그런 손주들을 혼내는 며느리의 잔소리도 없었다. 좁아터진 버스에서 춤추라고 끌어내는 계주도, 자기자랑만 실컷 늘어놓는 최여사도 없다. 그저 덜컹거리는 기차소리와 바람소리, 그리고 멀리서 자기들끼리 떠드는 소리가 작게 들려올 뿐이었다.

 

 

 ‘두 시간쯤 걸릴려나?’ 라고 생각한 할머니는 마음이 편해졌다. 새벽부터 움직인 탓에 몸이 약간 피곤했다. 덜컹거리는 창가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자리는 불편했지만 잠은 잘 올 것 같았다. ‘혹시 못 깨어나면 어떻하지?’ 하고 잠시 걱정이 되었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괜찮을 것 같았다. 어차피 친구에게 전화도 안 했으니 누가 기다릴 사람도 없었다. ‘될 대로 돼라지.’라고 생각하며 할머니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