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행여라도 발소리가 날까봐 할머니는 까치발을 들었다. 세 평 밖에 안되는 거실이 유난히 넓게 느껴졌다. 현관문에 도착해 문고리를 잡았다. 차가운 바깥 기온이 그대로 전달되었다. 깜짝 놀란 할머니는 하마터면 왼손에 들고 있던 옷가방을 바닥에 떨어 트릴 뻔 했다. 심장이 쿵쾅쿵쾅 거리는 소리가 마치 천둥소리처럼 들렸다. 이 정도의 심장소리라면 방에서 자고 있는 아들내외가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할머니는 차가운 손잡이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어 떨리는 손을 진정시켰다. 그 자리에 서서 잠시 동안 심호흡을 하며 가만히 귀를 기울인 채, 방안의 동태를 살폈다. 하필 아들내외의 방은 현관에서 가장 가까웠다. 거실 벽시계의 초침소리와 주방 냉장고의 모터소리가 들렸지만, 방안에선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들 내외와 손주녀석들은 깊이 잠든 것이 분명했다.
할머니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도둑고양이 같은 지금 모습을 들킨다면 뭐라고 둘러 댈만한 적당한 변명거리가 없었다. 아니, 변명은 고사하고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었다. 칠순이 다 된 나이에 가출이라니. 할머니는 피식하고 웃음이 났다. 어린 시절, 먼저 떠난 남편을 만나기 위해 꼭두 새벽부터 밭 갈러 나간다며 빈손으로 나가다, 아버지께 잡혀 혼줄이 났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어떻게 아셨는지 아버지는 할머니가 나가려고 마음만 먹으면 대문 밖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분명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고, 잠들기 전까지 어떤 티도 내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귀신같이 아셨다.
괜히 코끝이 찡해졌다. 지금 이 문을 열면 아버지가 대문에서 기다리고 계실 것 같았기 때문이다. 주책 맞다고 생각하며 힘을 주어 현관문을 열었다. 끼이익하며 소리가 조금 났지만, 그리 크지 않았다.
11월의 차가운 새벽바람이 집안으로 몰아쳤다. 몸이 추위를 거부하듯 잠시 부르르 떨렸다. 하지만 겨울 패딩을 꺼내 입었기에 추위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작년 이맘때쯤 막내 딸아이가 없는 살림에도 무리를 해서 사준 분홍색 패딩이었다. 아들 말로는 꽤 비싼 등산복이라고 했다. 할머니는 괜히 쓸데없는 짓 한다며 '그럴 돈 있으면 네 새끼들 옷이나 사 입히라'고 힌 소리를 했지만, 막내딸은 막무가내로 종이가방을 손에 쥐어 주었다. 심성이 착한 아이였다. 남편을 닮아 여리고 정이 많았다. 저 살기도 빠듯한데, 애미는 꼬박꼬박 챙겼다. 그런 딸아이가 알게되면 걱정할 걸 생각하니 마음이 편칠 않았다. 기회를 봐서 딸아이한테만 살짝 기별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들놈 한테는 절대 알리지 말라는 당부를 넣어서 말이다.
현관문이 등 뒤에서 철컥 소리를 내며 닫혔다. 밖에서 들으니 소리가 그리 크지 않았다.
‘아무렴 어때’
할머니는 이제 상관 없다는 듯 발걸음을 뗐다. 어슴푸레 밝아오는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이 맑았지만, 날씨는 꽤 찼다. 며칠 전 입동이 지났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겨울이 시작될 모양이다. 엇 저녁 '김장은 언제 해야 할까요?' 하고 묻던 며늘아이의 말이 생각나 할머니는 잠시 멈칫 거렸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고 대문을 향해 걸었다.
대문 앞에서 할머니는 한번 더 뒤를 돌아봤다. 할머니가 평생을 고생해서 마련한 집이었다. 작지만 두 발 쭉 펴고 편히 잘 수 있는 집이다. 홀로 아이를 키우며 집주인 눈치 보는 것이 서러워 이를 악물고 아끼고 또 아껴서 20년이나 걸려 마련한 집이었다. 식당 주방부터 미장원, 파출부, 노점상, 예식장 일용직까지 안 해본 일이 없었다. 남겨 놓은 재산 하나 없이 떠나 버린 남편을 원망도 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없었다. 살기 위해서는 악착같아 질 수 밖에 없었다.
자식들 키워 출가시키고 나면 죽을 때까지 이 집에서 편하게 살고 싶었다. 그래서 마당이 있는 집을 골랐다. 작은 화단도 있었다. 꽃을 뽑고, 상추랑 파, 토마토를 심었다. 마당 한 켠엔 장독을 놓았다. 열 개가 넘는 장독엔 작년에 담가 놓은 고추장과 된장이 반 이상이나 남아 있었다. 올 여름에 담근 매실청은 다음 주면 먹을 수 있을텐데, 할머니는 오늘 집을 떠나고 있었다.
기가 찾다.
당장이라도 방문을 열고 고집쟁이 아들놈 엉덩이를 걷어차고 싶었지만 그래봐야 말 한 마디 안하고 고집만 피울 놈이다. 그런 놈을 쳐다보고 있으면 울화통이 터질 사람은 자신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그만뒀다. 순하지만 똥고집은 지 애비를 닮았다. 어차피 이 문만 나서면 다 부질없어 질 것이다. 할머니는 결심이 선 듯 자물쇠를 돌려 빗장을 풀고는 왼손에 들고 있던 옷 가방을 꽉 쥐었다.
“며칠이나 참나 보자. 못난 놈!”
혼잣 말을 내 뱉은 할머니는 새벽거리로 나섰다. 대문 밖은 왠지 더 차가운 듯 했지만 패딩을 여미며 골목밖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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