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미선.. 아니 진아 씨.. 이 것 좀 복사해다 줄래요?"
이번에 새로 입사한 신입사원을 불러 회의 준비를 부탁했다.
"네? 네. 그럴게요. 몇 부나 해야 되나요?"
"아.. 음.. 8명이니까 10부만 부탁해요. 나 잠깐 나 갔다 와야 되니까 회의실 세팅까지 좀 해주겠어요?"
"네. 팀장님 다녀오세요... 팀장님.. 그런데 저는.."
그녀는 할 말이 있는 듯, 내 책상 앞에 서 잠시 망설이며 서 있었다.
"아.. 아니에요. 다녀오세요."
"왜요? 진아 씨. 무슨 할 말 있어요? 그냥 얘기해 봐요."
"아니에요 팀장님. 급한 일 아니세요? 별일 아니니까 어서 가 보세요."
쌍꺼풀이 짙은 커다란 눈을 깜박깜박 거리며 그녀는 책상 위의 서류를 집어 들었다.
"그래요 그럼. 나중에라도 할 말이 있으면 꼭 말해줘요. 알았죠?"
나는 등받이에 걸쳐 두었던 마이를 집어 들고는 서류가방을 주섬주섬 챙기며 말했다.
"네. 그럼 가보겠습니다."
그녀는 서류봉투를 들고 내 책상에서 멀어져 갔다. 그녀가 걸을 때마다 어깨까지 길게 늘어진 검은색 머리카락이 좌우로 찰랑거렸다. 하얀색 실크 블라우스에 같은 재질의 검은색 치마는 그녀의 머리카락과 꽤 잘 어울렸다. 문득 3년 전 헤어진 그녀의 긴 생머리가 생각이 났다.
"팀장님 안 가세요?! 늦었습니다."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내게 문 앞에서 기다리던 최대리가 큰 소리로 소리쳤다.
"어! 갈게. 가자고."
나는 허겁지겁 외투와 서류가방을 챙겨 들고 출구로 향했다. 오늘따라 열려있는 가방 문이 잘 닫히지 않았다. 걸으면서 가방의 잠금장치를 채우는 것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문 앞에 도착할 때까지 잠그지 못하자 최대리가 나서 도와주었다.
"왜요? 이번에 들어온 신입 아가씨의 엉덩이가 섹시해 보이던가요?"
가방을 잠그며 최대리가 짓궂은 농담을 던졌다.
"무슨 소리야. 내가 어딜 봤다고 그래. 너 그거 성희롱이다!"
"에이. 성희롱은 무슨. 그냥 농담한 건에요. 그럼 왜 진아 씨 뒷모습은 그렇게 빤히 쳐다보신 건데요?"
내가 퉁명스럽게 대답하자 최대리는 가방을 건네주며 물었다.
"어? 그거? 그냥... 옛날 생각이 좀 나서."
"네?! 미선씨요?! 또 생각하신 거예요?! 아휴. 팀장님도 참 대단하십니다."
우리는 빠르게 걸으며 말했다.
"팀장님 뒷통수 치고, 다른 남자 좋다고 찾아간 여자를 아직도 못 잊으면 어떻게요?!"
"못 잊긴 누가.. 그냥 진아 씨가 미선 씨를 닮아서 그런 걸 어떻게?"
"닮긴 뭐가 닮아요. 진아 씨가 훨씬 예쁘고 선하게 생겼는데. 옷 입는 것도 세련됐고. 닮은 구석이라고는 머리 긴 것 밖에 없는데. 도대체 어디가 닮았다는 거예요?"
최대리는 황당한 표정으로 E/V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최대리의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분명 진아 씨가 훨씬 더 미인이었다. 하지만 진아 씨는 분명 그녀와 닮은 구석이 많았다.
"혹시 또 진아 씨한테 미선 씨라고 부르신 거 아니에요? 아까 진아 씨가 잠깐 뭐라 하는 것 같던데?"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주차장을 누른 최대리가 물었다.
"응? 아... 그러고 보니 아까 이름을 착각하긴 했네."
"네? 또요?! 하..." 한숨을 크게 내쉰 최대리가 진지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팀장님. 지난번에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팀장님 그러실 때마다 진아 씨가 많이 힘들어한다고요. 옛날 애인 이름으로 자꾸 불리는 거 좋아하는 사람이 어딨겠어요?"
나는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진짜 신경 좀 쓰세요. 그리고 그만 좀 잊으시고요."
최대리와 나는 차를 몰고 거래처로 향했다. 점심시간이 끝난 터라 도로는 한산했다. 차는 빠르게 달려 올림픽 대로에 진입했다. 날씨는 맑아 한강에 부서진 햇살이 반짝거렸다. 최대리는 능숙하게 차들을 추월하며 제한속도보다 살짝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나는 창문을 살짝 열어 따듯하고 시원한 바람을 맞았다. 속도가 붙은 탓에 소음이 크게 들렸지만, 내 마음을 아는지 최대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혹시 말이야..."
내가 입을 열자, 최대리는 내 목소리가 잘 안 들리는지 창문을 닫았다.
"... 내가 그때 잡았으면 안 떠났을까?"
"흠..."
최대리는 핸들을 바꿔 잡고, 왼손을 창가에 받쳐 머리를 괴었다.
"글쎄요..."
그리고 잠시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 요즘 여자들, 솔직히 조건 안 따지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미선이도 요즘 여잔데요. 뭘."
"... 그렇지? 아마 잡았으면 나만 더 비참 해졌겠지?"
"그래도 형 열심히 했잖아요. 미선이 때문에 팀장도 빠르게 달았고, 전세금도 마련해서 지금은 아파트에도 살고. 전 미선이 때문에 형이 열심히 살게 된 것 같아서 그렇게 나쁘다고만 보진 않아요."
"그건 나도 그래. 그냥 그때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좀 할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요즘은 자꾸 들어서..."
나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최대리는 창문을 열어 주었다.
"아쉽죠. 형이 많이 좋아했으니까. 둘이 잘 어울리기도 했고. 그런데 뭐 어쩌겠어요. 둘이 인연이 아닌 거지."
최대리도 창문을 열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양쪽 창문을 열자 바람소리가 엄청 크게 들렸다.
그래서 나는 큰 소리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 참 불공평하지 않냐?!
이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닌데...
그냥 세상에 태어나 보니 그랬던 것뿐인데...
왜 결정적인 순간엔 꼭 태어날 때 받은 그 운이 다 결정해 버리냐고...!
아무리 열심히 살면 뭐해!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운빨 좋은 놈들 발끝도 못 따라가는데...!
아! 씨발!!"
시원하고 따듯한 바람이 창문을 통해 계속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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