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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글/단편소설

단편) #3. 창문이 있는 집

by 바꿔33 2020. 4. 11.

 

"어제는 뭐했어?"

 

 작지만 여운이 남는 목소리였다. 

 

 "어제?" 

 

 왜 어제 일을 묻는 것일까? 뭔가 알고 있는 것일까?

 

  "어제는 별일 없었는데? 그냥 평소랑 똑같았어. 수업 듣고, 도서관 갔다가 밥 먹고 집에 왔지. 요즘 매일 인강 듣느라 바쁜 거 알잖아." 

 

 입으로는 거짓말을 뱉으며 눈으로는 그녀의 표정을, 귀로는 숨소리를 쫒았다. 평소 눈치가 빨라 어떤 말이라도 금방 진실과 거짓을 구분 질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그녀였다. 친구들과 답답한 마음을 달래려 술 한잔 기울일 때 전화가 오면 아무리 주변을 조용하게 세팅하고 집 인척 연기를 해도 그녀는 단번에 알아차리곤 했다. 매번 어떻게 그렇게 족집게처럼 알아맞추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녀는 

 

"오빠. 요즘 핸드폰은 기술이 발전해서 공기가 전달되. 알지? 밖이란 집은 공기가 다른 거? 난 그 공기를 마시고 아는 것 같아."

 

라고 이야기를 하곤 했다. 공기가 다르다고? 물론 나도 공기가 다른 것은 안다. 집에서 받는 전화와 밖에서 받는 전화는 분명 차이가 있다. 하지만, 그 차이는 너무나도 미묘하여 특별한 소음만 차단한다면 그 차이를 확연하게 줄일 수가 있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공기가 전달된다고? 그것도 전화기를 통해서? 신문기사도 꼼꼼히 챙겨보고, 주변 친구들과 교류도 활발하여 왠만한 이야깃거리들은 다 알고 있었지만, 어디서도 그런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야. 그런게 어딨냐?" 

 

 내가 재차 물어도 그녀는 똑같은 이야기만 되풀이할 뿐, 다른 어떤 Tip 도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아니, 다른 Tip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어제는 전화도 하지 않았다. 평소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전화를 하는 그녀였지만, 어제는 웬일인지 메시지가 왔다. 어디냐고 밥은 먹고 하는 거냐고 말이다. 아직은 날이 어둡기 전이라 도서관에 있었는데, '오늘은 몸이 안 좋아 집에서 쉴 테니 딴짓하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하고 집에서 일찍 쉬라'는 메시지가 왔다. 

 

 '몸이 어디가 않 좋으냐? 많이 아픈 것이냐? 약 사다 줄까?'라고 메시지를 보냈지만, 특별히 어디 아픈 게 아니니 걱정마라는 답이 돌아왔다. 전 날 야근을 해서 몸이 피곤해하는 것 같다고 그냥 쉬면 낫는다고 했다. 그제야 걱정이 사라졌다. 예전부터 이런 일은 종종 있어왔던 터라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정상으로 돌아오리라는 것은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편히 쉬어라 사랑한다 라는 메시지를 끝으로 족쇄가 풀렸다. 

 

 1년에 2~3번 찾아오는 그 귀한 날이 바로 어제였던 것이다. 더 이상은 어떤 연락도 오지 않았다.  그렇게 모든 위험요소가 제거된 어제의 일을 그녀가 알아 챌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여전히 긴장이 되었다. 

 

 "그래? 믿어도 되지?" 

 

 아까보다는 약간 밝아진 목소리 톤이었다. 아주 미묘한 변화. 지금처럼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지 않았다면 카페의 음악소리에 묻혀 못 알아 볼 수도 있는 아주 미세한 차이였다. 지금을 놓지면 어제 일을 그녀가 알아챌 수도 있었다. 마지막 관문인 멘트를 날린다. 

 

"그럼. 야. 어제 인강 들은 것만 몇 강인지 알아? 도서관에서 듣다 저녁먹고 집에서도 또 2강이나 더 듣고 잤단 말이야. 이제 시험도 며칠 안 남았는데, 허튼짓 할 시간이 어딨어. 내년엔 제발 이 짓 좀 진짜로 벗어나고 싶다." 

 

 그녀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됐다. 이제 더이상 어제의 일은 얘기가 나오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 기술로 가능성의 1%까지도 없애버려야겠다. 

 

 "그런데 몸은 괜찮아? 요즘 회사에서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응. 아니야. 걱정마. 어제 푹 쉬었더니 이제는 괜찮아." 

 

 그제서야 아까부터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던 하얀색 머그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녀의 손에 비해 잔이 유난히 커 보였다. 커피숍은 좀 빠른 오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빈자리가 몇 개 보이지 않았다. '주말의 시작은 커피와 함께~'라는 광고 카피라도 나온 것일까? 커피숍에 자주 가는 편은 아니었지만, 왠지 오늘은 유난히 사람이 많아 보였다. 

 

 대부분의 Table엔 2~4명이 무리를 지어 앉아 수다를 떨거나 진지한 표정으로 각자의 휴대폰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간 혹 혼자서 노트북을 펴 놓고 뭔가에 집중하는 사람도 몇몇 끼어 있었다. '도대체 각자 휴대폰을 볼 거면 뭐하려고 만나는 거지?'라고 생각하는데,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 

 

 지이잉~ 

 

 "오빠 잠깐만. 나 전화 좀 받고 올께." 

 

 그녀의 손보다 커다란 핑크색 전화기를 손에 들고는 밖으로 나갔다. 안 그런 척하고 있었지만, 얼굴에 약간 짜증이 드러나는 것으로 보아 분명 회사에 누군가가 주말임에도 귀찮게 하는 모양이었다. 작년에 입사하였지만 이미 그녀는 회사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대기업 계열의 작은 하청회사로 초봉도 괜찮고 복지도 좋은 회사라고 했었다. 특히 나중에 결혼하면 육아휴직도 편하게 쓸 수 있는 분위기가 잘 갖춰져 있다며 그녀는 좋아했었다. '결혼하면? 얘는 나랑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는거야?' 그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했던 생각이었다. 만난 지 3개월이 채 되지 않았을 때였고 연애보다는 공부에 더 집중하고 있을 때라 너무 앞서간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2번이나 시험에 떨어지고 나니 묵묵히 옆을 지켜주던 그녀에게 점점 빠져버렸고, 지금은 빨리 시험에 합격해서 그녀와 함께 하고 싶은 생각 밖에는 없다. 그녀의 관심이 조금 지치게 만들때가 있었지만, 그래도 가끔씩 바람을 쐬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서운하고 지친 마음이 싹 달아나 버렸다. 

 

 휴대폰 시계가 10시 30분을 가르키고 있었다.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전화를 받으러 나간 그녀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이제 영화 시간은 30분밖에 남아 있지 않다. '화장실이라도 간 건가?' 평소 회사 전화를 이렇게 오래 하는 경우는 없었는데, 나간 지 10분이 다 되도록 그녀는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늦어도 20분 전에는 출발해야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없이 영화관에 입장할 수 있다. 특별히 영화를 볼 생각은 없었지만, 어제의 자유에 대한 보답을 하고 싶었다. 평소 영화를 좋아하는 그녀는 영화를 같이 보면 화가 풀리곤 했었다. 내 잘못이 크던 작던 그런 것은 중요치 않았다. 그녀에게 영화는 특별한 진정제이며 활력소였다. 다만 진짜로 화가 나면 절대로 영화관을 가지 않는다고 했다. 영화는 진짜로 보고 싶은 사람과만 본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나는 거부당한 적은 없었다. 아니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말이다. 


 딸랑딸랑~. 출입문에 달려 있던 경첩이 울리며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자리로 돌아온 그녀에게

 

 "얼른 일어나. 이제 영화시간 다 됐어."

 

 라고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화? 무슨 영화?"

 

 그녀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응 어제 너 컨디션 않좋다고 해서 내가 기분 전환시켜주려고 예매해놨어. 너 영화 본지도 꽤 됐잖아." 

 

 주섬 주섬 짐을 챙기며 쿨한척 그녀의 놀라는 반응을 기대했다.

 

 "어? 그래? 아..." 

 

 그러나 그녀는 내 말을 듣고도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응? 이게 아닌데..?' 평소와는  전혀 다른 반응에 나는 어리둥절했다. 

 

"왜? 영화보기 싫어?" 

 

라고 물으며 그녀의 눈과 마주쳤다. 미인은 아니었지만, 유독 눈이 많이 예뻣다. 만화 속에서나 나올법한 커다란 눈망울과 길고 짙은 속눈썹. 브라운에 가까운 눈동자 색깔까지. 그녀의 어디가 좋으냐고 물어오면 난 항상 주저 없이 눈!이라고 말을 했었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순수한 마음이 전달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내 마음속 악한 부분을 정화시켜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조금이나마 내가 착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은 착각이 들게 하는, 그녀는 그런 눈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그녀의 눈에서는 어떠한 마음도 전달이 되지 않았다.

 

 "어. 왜그래. 무슨 일 있어?" 

 

 그녀는 내 눈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고, 두 손은 커피잔을 이리저리로 돌리고 있었다. 

 

 "오빠, 잠깐만 앉아봐." 

 

 짐을 챙기던 나는 그녀의 말에 가방을 가슴에 안은채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왜? 영화시간 얼마 안 남았단 말이야. 5분 안에 안 나가면 우리 늦어." 

 

 내 재촉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목소리는 전혀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는 머그잔을 들어 한참이나 입술에서 떼지 않으며 커피를 홀짝거렸다. 그녀의 눈은 이미 테이블에 고정이 된 상태였고, 시간의 흐름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왠지 시끄러웠던 카페 안의 공기가 일순간 차가워져 바닥으로 가라앉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순간 모든 사람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일제히 우리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나는 더 이상 내 눈과 마주치려 하지 않는 그녀의 눈을 지나 콧등을 지나 그녀의 입에 시선을 맞췄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혹시 어제 일을 알고 있는 걸까? 아니야. 분명 그녀는 어제의 일을 알 수가 없을 텐데?'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내 뇌가 지금처럼만 움직여 주었다면 이미 시험에 합격하고도 남았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왜 무슨 일 있어?' 라고 평범하게 물어보고 싶었다. 평범하지 않은 상황임에는 분명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더욱 침착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것쯤은 이미 알 나이가 지났다. 하지만, 입이 쉽게 떨어지지가 않았다. 만약 어제 일을 그녀가 알고 있다면 나는 뭐라고 해야 하지? 어떻게 대답해야 그녀를 영화관으로 옮겨 놓을 수 있지? 생각에 여기에 미치자 이미 나는 어제 일을 들켜버린 것처럼 마음이 답답해 오기 시작했다. 

 

 뇌가 돌아가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고 그녀에게도 이 소리가 들릴까봐 불안해졌다. 불안한 마음을 감추기 위해 남아있던 아이스커피잔에 뚜껑을 열고 입을 대고 벌컥벌컥 마셨다. 그때 그녀의 입술이 움직였다. 

 

"어제 말이야." 

 

 커피잔을 내려 놓으며 그녀는 말했다. 역시. 어제가 문제였던 것이다. 도대체 어디서 비밀이 새어 나간 것일까? 아니, 아까 내 대처가 미흡한 점이 있었나? 나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이미 손바닥과 등줄기에 땀이 나고 있었다.

 

 "어제? 어제 왜? 집에 들어가서 인강듣고 잤다니까?"

 

 목소리의 톤이 약간 올라가있었다. 아. 전형적인 우기기 상황 같아 보였다. 그녀는 아직 차분한 목소리를 이어가고 있었다.

 

 "아니. 오빠말고. 나 말이야." 

 

 그녀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응? 내 얘기가 아니라고? 나는 빠르게 평정심을 찾아갔다.

 

 "응 그렇지. 어제는 아무일도 없었는데 뭐. 근데 뭐? 어제 왜? 무슨 일 있었어? 아직까지 아픈 거야?" 

 

 최대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나는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평소보다 얼굴에 활기가 떨어져 보이긴 했지만, 어딘가 아파 보이거나 큰 문제가 있어 보이진 않았다. 굳이 한 가지 다른 점을 꼽으라면 항상 활기에 가득 차 있던 그녀의 눈이 평소와는 다르게 짙은 갈색 빛을 띠고 있다는 점뿐이었다.

 

 "아니야. 오빠. 아프거나 한 건 아니야." 

 

 잠깐 뜸을 들이던 그녀의 눈에 잠깐의 빛이 스치고 지나가는 듯했다.

 

 "사실 나 어제 정재 씨한테 프러포즈받았어. 그리고 그거 수락하려고.."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며 말했다. '응? 이건 무슨 소리지?' 나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니 커피숍 안의 노랫소리와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시끄러워 아무런 소리도 못 들은 것이 분명했다.

 

 "뭐라고? 민영아. 잘 못 들었나 봐. 어제 뭐라고?" 

 

 카페 안에는 Jason Marz의 I'm yours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의 달콤한 목소리에 잠시 내가 취했었나 보다.

 

 "미안하지만 오빠. 나 얼마 전에 선을 봤는데.. 내가 나서서 보려고 한건 정말 아니었어. 오빠 알잖아 나 그런 거 싫어하는 거. 정말 나가기 싫었는데, 엄마랑 이모가 꼭 나가봐야 한다며 억지로 끌고 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나갔던 거야. 오빠. 나 이해하지? 응?" 

 

 그녀는 거의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내 얼굴을 보며 믿어달라는 표정을 지었다. 얼떨결에 나는

 

 "아.. 응.. 이해하지.."

 

라고 말해버렸다. 도무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나는 전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저 멍하니 앉아 그녀의 입술이 움직이며 뱉어내는 말에 기계적인 답변이 자동으로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거기서 정재 씨를 만났는데, 엄마랑 이모가 사람을 최소한 3번은 봐야 알지 어떻게 한 번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냐고 성화 셔서... 어쩔 수 없이.. 흑.." 

 

그녀는 이제 거의 흐느끼고 있었다. 그렇지. 엄마랑 이모 말씀이 맞지..라고 나는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 그래서?"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줄 몰랐다. 아마 친구나 아는 사람 얘기를 하는 건가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숙인 채 어깨까지 들썩여가며 흐느끼는 그녀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울지? 친구 얘기가 그렇게 슬픈가? '어... 우리 민영이 저렇게 울면 안 되는데, 내가 않아줘야 하는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몸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가 내 온몸에 강력본드를 발라 마디마디 조차 다 굳어 버린 것만 같았다. 내 목소리에 그녀가 흐느끼던 울음을 조금씩 멈추며 진정하려고 애를 쓰는 것 같았다. 

 

"오빠.. 미안해.." 

 

 그녀는 한마디도 말을 제대로 잊지를 못했다. 단어들 사이에 공간이 많았고, 그 공간은 대부분 흐느낌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도통 이해가 되질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녀의 흐느낌은 점점 줄어갔지만, 나의 이해력은 점점 더 떨어져 갔다. 그녀는 분명 무엇인가 말을 하고 있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내 귀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뿐만이 아니라, 노랫소리도 이 많은 사람들의 웅성거림조차 말이다. 분명 사람들의 움직임, 창밖의 자동차며 행인들, 가로수 모두 움직임에는 이상이 없었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그것들은 어떤 소리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분명 내 달팽이관에 문제가 생긴 것이리라. 팔을 뻗어 귓속을 좀 건드려봐야겠다. 싶어 팔을 움직이려고 하는데 여전히 발가락 하나도 꼼짝할 수가 없었다. 마치 이른 밤 선잠을 자다 가위에 눌린 것처럼 내 앞의 그녀는 울기도 웃기도 하며 계속 무엇인가를 설명하려 애썼고, 온몸으로 나에게 동의를 구하기도 했다. 

 

 그런 그녀를 나는 가만히 바라보고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떤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녀의 표정은 조금씩 평정심을 찾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무슨 말이라도 해봐. 오빠" 이번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작고 핑크빛이 감도는 윤기 나는 입술이었다. 그 입술이 위아래도 조금씩 움직여 나에게 말하는 소리가 이번엔 들렸다. 

 

 하지만, 내 몸은 어느 한 부분도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지 않았다. 내가 눈을 깜빡이고 있는 건지도 숨은 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우리는 한참이나 가만히 앉아 있었다. 내 눈은 분명 그녀의 얼굴 이곳저곳을 옮기며 그녀의 시선을 찾아다니고 있었지만, 그녀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시간이 조금씩 흐를수록 주변의 소리가 조금씩 되살아나고 있었다. 옆 테이블의 커피잔 소리, 빨대를 통해 음료가 목을 타고 넘어가는 소리, 저 멀리 문에 달린 풍경이 딸랑거리는 소리, 창 밖의 행인들의 발걸음 소리까지 들리는 듯했다. 그러자 너무나도 많은 소리들이 한꺼번에 내 귓속을 파고들었다. 귀를 통해 들어오는 이 세상의 모든 소리들은 이미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내 귓속을 넘어 머릿속을 뚫어되고 있었다. 

 

 "아아악!! 그만!! 제발 그만해.!!"

 

 나는 두 손으로 귀를 감싸며 소리를 질러버렸다. 순간 모든 소리들이 일순간에 멈췄다. 내 주변의 모든 세상이 마치 순식간에 사라진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또 한동안 멈추어 있었다. 아마도 자기 방어를 위한 순간의 몸부림이었던 모양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두귀를 틀어막은 채 나는 그대로 또 한동안이나 가만히 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내 앞에 그녀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가 마시던 머그잔도 앉아 있던 의자도 그대로 있었고, 카페 안의 사람들도 노랫소리도 그리고 소음들까지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지만, 그녀는 내 앞에 없었다. 3시.. 카페 안의 벽시계는 지금이 3시라고 가르쳐주고 있었다. 

 

 카페 안은 아까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카운터에는 음료를 사기 위한 사람들이 긴 줄을 이루고 있었고, 주변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이 괜히 나를 힐끔거리며 쳐다보는 것 같았다. 나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무릎 위에 올려져 있던 가방이 툭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하지만, 나는 가방을 주워 들 엄두가 나지 않았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새 모양의 풍경이 달려 있는 출입문쪽으로 향했다. 

 

 아무것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냥 빨리 저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야 된다는 생각밖에는 없었다. 공기가 무거워져 있었다. 들어올 때보다 10만 배는 더 되는 것 같은 무게로 내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다. 검은색의 나무문이었다. 중간중간 구멍이 뚫려 있었으며 불투명한 유리는 희뿧연 빛을 통과시키며 나른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 빛 속으로 무거운 공기들의 입자들이 보였다. 동그랗고 무지개색을 가진 공기들이 한 개 혹은 두 개 혹은 여러 개가 뭉쳐 이리저리 떠다니고 있었다. 

 

 무거워진 공기를 뚫고 출입문을 열은 그 순간, 내 방에도 창문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당장 들어가서 사장에게 말해봐야겠다. 창문이 있는 방으로 옮겨 달라고 말이다. 얼마의 돈을 더 내야 하겠지만, 왠지 그러지 않으면 내일 아침엔 내 손목에서 피가 나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을 자신이 없다.  통장에 돈이 있었던가? 생활비가 남아 있었던가? 냉정한 현실이 머릿속을 차갑게만 만들고 있었지만, 이내 볼가에 습하고 더운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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