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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글/감상평

감상평) #7. 무라카미 하루키, 잠

by 바꿔33 2020. 2. 22.

시립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는 것은 꽤 큰 인내심을 필요로 합니다. 조금이라도 인기가 있다 싶으면 책꽂이에 꽂혀 있질 않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항상 대여중입니다. 홈페이지에 보면 예약시스템이 있는 모양이지만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꼭 당장 읽어야 되는 커다란 이유는 없기 때문에 굳이 선호하지는 않습니다. 덕분에 아주 운이 좋지 않은 이상 따끈따끈한 신간을 읽을 기회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잠' 이라는 소설이 나온 모양입니다. 얼마 전 자주 나가는 독서토론회에서 주제도서로 선정되어 알게 되었습니다. 혹시나 하고 도서관을 찾았지만 역시나 책은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다른 책을 빌려 읽고는 토론회는 얼렁뚱땅 넘겨버렸습니다. 읽지도 않은 책을 읽었다고 할 수는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토론 내용이 꽤 재미 있었습니다. 다른 회원님들의 찬사가 토론시간 내내 끊이지 않더군요. 그 상황이 계속 머릿속에 남았었는지 2주 만에 도서관으로 가는 길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른 책 제목이 '잠'이었습니다. 이번엔 꼭 있었으면 하는 기대를 품고 검색대에 책 제목을 입력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나 대여중. 아쉬움을 뒤로하고 검색대를 막 떠나려는데 똑같은 제목의 하루키씨 작품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그렇게 만나게 된 작품이 오늘 소개하려는 '잠 - 무라카미 하루키'입니다. 

 

제목 : 잠

작가 : 무라카미 하루키

장르 : 단편(?) 소설

출판사 : (주)문학사상

출시 : 2012년 10월 22일

가격 : 13,800원 (Yes24 기준, 정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출간했던 모든 책을 찾아 읽었을 정도로 좋아했었던 적이 있던 작가라 주저 않고 책을 빌려왔습니다. 사실 베르베르 보다 훨씬 많이 좋아하는 작가라 차라리 이 편이 더 만족스러웠습니다. 

 

기대감을 가지고 책을 펼쳐 보니, 표지 속의 여자가 다시 한번 얼굴을 내밀고 있습니다. 기왕에 그릴 거면 누가봐도 미인인 얼굴을 그려 놓는 편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남색 바탕에 눈을 크게 뜨고 놀란 표정을 지은 여자의 얼굴만 덩그러니 그려 놓다니. 어째 편안하고 포근하고 따듯한, 그런 종류의 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것 같지는 않더군요. 꼭 공포영화 속 에서나 나올 법한 표정과 진남색이 잘 어우러져 꽤 스산하고 음산한 기운을 내뿜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사진을 찍는데 유독 빛 반사가 심한 종이가 사용되었더군요. 이거 뭐지? 하고 자세히 살펴보니 일반 책과 다르게 모든 종이가 꽤 두꺼운 재질의 고급용지가 사용되어 있습니다. 보통 인화지?라고 불리는 정도의 종이 재질입니다. YES24를 참고하니 양장본이라고 하네요. 

 

 이런 책은 읽는 사람들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책장을 넘길 때 손 끝으로 전해지는 부드러우면서도 매끈한 감촉. 그리고 적당한 정도의 텐션(강도)을 모든 페이지마다 동일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책 값이 옛날 책 치고는 조금 비싸다고 느꼈었는데 이유가 있었네요. 

 

 보통 양장본이라고 하더라도 겉표지만 하드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은 속지까지 신경 써서 더욱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나중에 나도 책을 내게 되면 꼭 이런 식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직은 희망사항이지만요. 

 

 

 또 한가지의 특징은 삽화입니다. 삽화를 그린 작가는 카트 멘쉬 크라는 독일 사람으로 꽤 저명한 일러스트레이터인 듯합니다. 찾아보니 상도 좀 받고 그런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그려 놓은 이미지는 책의 내용에서 받았던 내 상상과는 조금 달라서 보는 내내 조금 곤혹스러웠습니다. 최근에는 출판의 추세가 사진과 영상을 결합한 출판물까지 등장하며 인터넷 시대의 특징을 따라가는 듯합니다. 뭐 어쩔 수 없는 시대적 변화라고 생각은 합니다만, 개인적으로는 이런 방향의 흐름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글은 겉으로 보기엔 굉장히 건조하고 단순한 1차원적인 표현수단에 불과 하지만, 글이 독자의 눈에 읽히기 시작하면 그것은 즉시 4차원적인 세계를 표현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현재의 기술로는 분명 설명하기 힘든 부분일더러 표현은 더더욱 불가능합니다. 그러한 무한의 능력을 가진 글(Text)이 주는 감성을 단순히 작가의 시선에 보인 모습으로 축소시켜버리는 것은 작가들의 실수가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삽화를 넣는 것도 존중은 합니다. 작가의 결정이고 내 책이 아니니까요. 읽을때는 그냥 삽화에 눈을 두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영향력을 최소화시킬 수는 있으니까요. 

 

 

 책은 양장본이라 그런가 술술 잘 읽힙니다. 하루키 특유의 문장력과 흡입력 때문이겠지만 분명 종이의 재질과 편집기술도 영향력이 큰 것 같습니다. 특히나 이번 책은 말이죠. 

 

 내용은 잠을 자지 못하는 여자의 이야기 입니다.이야기입니다. 잠을 자지 않아도 정상적으로 생활이 가능하고 그런 자신이 이상한 것 같아 걱정하다 결국 그 시간을 온전히 자신만을 위한 시간으로 활용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야기입니다. 

 

 뭐 있을 법한 이야기이고 한번쯤은 생각도 해본 적 있는 스토리이기 때문에 내용은 크게 논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항상 하게 되는 이야기이지만 작가의 세밀한 묘사와 꼭 여자가 쓴 것 같은 표현력은 칭찬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나 챕터 3의 도입 부분(p48 ~ 49)에 표현력에 감동 받았다. 여자의 일상을 아주 담담한 어조를 넘어 건조하게 적어 놓은 간단한 문장들의 연속. 

 

... 생략...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남편에게 커피를 챙겨주고 아이에게는 핫 밀크를 주었다. 남편은 토스트를 먹고 아이는 콘플레이크를 먹었다. 남편은 신문을 주욱 읽고는 몇몇 기사에 관해 의견을 말했다. 아이는 새로 배운 노래를 작은 소리로 부르고 있었다. 그런 다음에 두 사람은 크림색 블루버드를 타고 나갔다. 조심해요,라고 나는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고 남편은 말했다. 두 사람은 내게 손을 흔들었다. 평소와 똑같았다. 

... 중략...

나는 냉장고 문을 열고 안의 것들을 점검했다. 그리고 오늘 하루 쇼핑을 하지 않아도 별 지장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빵도 있다. 우유도 있다. 달걀도 있다. 고기도 냉동되어 있다. 대충 필요한 만큼의 야채도 있다. 내일 점심 식사 때까지 쓸 재료는 빠짐없이 갖춰져 있었다. 

 은행에 갈 일이 있지만 반드시 오늘 중으로 가야 하는 건 아니다. 내일로 미뤄도 된다.

... 후략...

 

나 같으면, 냉장고에 있는 물건들을 묘사할 때,

 

빵도 있고, 우유도 있다. 달걀도 넉넉하고 냉동실엔 고기도 있다. 넉넉하진 않지만 곁들일 만한 야채도 있다. 분명 내일 점심식사 때 까지는 버틸 수 있으리라. 

 

 이런 식의 표현이 가장 건조한 정도인데, 단 4글자만 가지고 문장을 마무리 지을 수 있는 그의 용기에 감탄했습니다. 하긴 그렇게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 능력 자니까 가능하겠지만. 

 

 책은 넉넉잡아 2시간이면 충분히 읽어 낼 것입니다. 빠르면 1시간 내에도 가능합니다. 양도 많지 않고, 내용도 어려운 부분이 없이 술술 잘 읽히니까요. 생각하게 만드는 문장도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결말에 대한 논란은 조금 있겠지만. 

 

 여행 가는 밤 기차 안에서(버스는 추천하지 않는다.) 혹은 여행지의 포근한 침대 속에서 읽기 좋은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