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탑글방_단편] #1. 전초전
사랑하는 그녀와 결혼을 했다. 결혼식 날 그녀는 세상 누구보다 아름다웠다. 각자 다른 곳에서 태어나 수십 년 동안 다른 삶을 살아온 우리는 두 시간의 짧은 결혼서약을 통해 부부가 되었다. 결혼생활은 생각보다 훨씬 더 멋졌다. 사랑하는 사람과 한 공간에서 함께 지내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축복 받은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신혼여행을 다녀온 우리는 여전히 분주한 날들을 보냈다. 낮에는 양가 부모님과 친지 분들께 인사를 드렸고 저녁엔 각 자의 친구들과 결혼생활의 즐거움에 대해 전파하기 바빴다. 친구들은 콩깍지가 단단히 씌였다며 핀잔을 줬다. 그 사랑 얼마나 가는지 보자며 으름장을 놓는 친구놈도 있었지만, 하찮은 경험으로 판단 될 만큼 약한 사랑이었다면 결혼식은 열리지 않았을 것이라 호언장담을 했다. 크게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나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모임에 바쁜 나날이 끝나가던 어느 날 새벽, 나는 침대에서 눈을 떴다. 내 품에서 곤히 잠든 그녀는 아직 꿈나라에 있었다. 얼굴 가득히 사랑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잠든 그녀는 분명 꿈속에서도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그녀를 깨우고 싶지 않아 조용히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욕실 불을 켜자 자동으로 돌아가는 팬소리가 크게 느껴졌다. 혹시라도 그녀에게 방해가 될까 싶어 서둘러 문을 닫고, 샤워기를 틀었다.
'쏴아아~' 시원한 물줄기가 쏟아졌다.
생각보다 차가운 물줄기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간단히 샤워를 하고 거울 앞에 섰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요즘따라 유독 잘생겨보였다. 생각해 보니 그녀를 만난 후 잘생겼졌다는 소리를 유독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이류를 곰곰히 생각해 보니 예전보다 더 많이 웃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흡족한 미소. 진짜로 원하는 것을 이루었을 때 나타나는 행복에 겨운 미소. 어떠한 조건이나 상황도 따지지 않은 순수한 사랑 그 자체가 바로 우리 둘이었다. 그러니 내가 웃지 않을 이유는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수건을 꺼내려 수납장을 열었다. 그런데 수건이 없었다. 햇볕에 잘 말려진 수건 말이다.
'어? 왜 수건이 없지?'
샤워의 완성은 까슬까슬한 수건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태양에 잘 말려진 수건의 햇볕 냄새. 하지만, 오늘은 그 느낌을 느낄 수가 없다. 아쉬운 마음에 이곳 저곳을 더 찾아보았지만, 뽀송뽀송 수건은 진짜 없었다. 문을 열고 나가 수건 서랍장에서 새 것을 꺼내면 되겠지만, 문을 열고 부스럭거리면 깊은 잠 속에서 나와 함께 할 그녀를 깨울 것만 같아 그만두기로 했다.
수건걸이엔 어제저녁에 사용한 듯한 수건이 구겨져 걸려 있었다. 잘 펴 놓기라도 했으면 마르기라도 했을 텐데, 그냥 아무렇게나 걸어놓은 터라 축축하고 약간 시큼한 냄새도 나는 듯했다. 덕분에 상쾌했던 아침 기분이 조금 시큼하고 축축해졌다. 물기만 대충 훓어 내 듯이 닦아 내고는 수건을 세탁기에 넣기 위해 세탁실로 향했다. 찝찝했던 수건 탓인지 발바닥으로 전해지는 바닥에도 먼지가 많은 것 같았다. '기분 탓이겠지' 상쾌하고 행복했던 아침의 느낌을 깨고 싶지 않아, 애써 모른 척했다.
세탁실에 도착해 세탁기를 향해 세탁물을 던졌다. "슛~!" 하지만, 노골. 깔끔하게 들어갔으면 찝찝함을 털어 낼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웠다. 떨어진 수건을 집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그런데 세탁기의 뒤쪽 틈새 사이로 양말이 보였다. 틈 사이로 손을 뻗어 하얀색 양말을 꺼내 들었다. 양말은 꽤 오랜 시간 이 곳에 떨어져 있었던듯, 축축하게 젖은채로 누렇게 오염되어 있었다.
얼마전 양말 한 쪽만 먹고 사는 괴물이 있을거라며 투덜거렸던 아내의 양말들이었다. 웃으며 그런 괴물은 없으니 잘 찾아보라고 그녀를 달랬었는데, 역시 괴물은 없었다. 혹시 몰라 세탁기 주변 틈새를 살펴 보았다. 양말 3장과 속옷 한 세트가 더 있었다. 모두 그녀의 물건이었다. 오래된 시간만큼 오염이 심해, 세제를 많이 넣었다. 이 정도 세제면 묵은 때까지 충분히 빼고도 남을 것 같았다. 동작 버튼을 누르고 시원하게 쏟아지는 물소리를 들으니 찝찝한 마음이 씻겨내려가는 느낌이 든다.
시원한 냉수가 땡겼다. 세탁기 물소리만큼 시원한 냉수한잔. 주방으로 와 컵을 찾았다. 그런데 컵이 없다. 늘 올려져 있어야 하는 식기 건조대에 컵이 한 개도 없었다. 아래를 보니 어제저녁 때 먹었던 그릇들이 그대로 계수대에 담겨 있었다. 음식물 찌꺼기가 잔뜩 묻은 그릇들 사이에 컵이 끼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자 살짝 짜증이 났다. 설거지는 바로 하는 것이 가장 좋다. 기름기가 남아 있는 그릇과 일반 그릇을 따로 담고, 컵은 꼭 분리해 두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오염이 다른 그릇에도 퍼져 설거지도 힘들고 위생상도 좋지 않다. 특히 찌개류나 고기류가 담긴 그릇은 반드시 분리해 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옥을 맛보게 된다. 하지만, 어제저녁 제육볶음과 김치찌개를 먹은 우리집 싱크대에서 이런 참사가 일어나다니. 나는 끔찍한 지옥을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