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글/단편소설

단편) #4. 가디건

바꿔33 2020. 4. 11. 21:27

 

 하루 종일 카디건을 벗지 않았다. 하늘은 비가 올 것처럼 온통 거무튀튀한 구름이 덮고 있었고 어제 들었던 일기예보에서는 비가 쏟아질 거라고 들은 것 같았지만, 다행히 비는 쏟아지지 않았다. 대신, 시원한 듯 찝찝한 듯 애매한 상태의 날씨가 하루 종일 카디건을 벗어야 할지 그냥 입고 있어야 할지 수 없이 고민하게 만들었었다. 조금만 몸을 움직이거나 실내로 들어가면 텁텁한 공기가 카디건을 벗으라고 재촉하였고, 차에 가서 벗으려고 밖으로 나오면 금세 시원한 바람이 입고 있어도 괜찮다며 다독여 주었다. 결국 고민만 하다가 하루 종일 카디건을 입고 생활을 하였다. 

오늘 입은 가디건은 얼마 전 LG패션 상설매장에서 구입한 연노란색의 루즈한 카디건이다. 몇 년 전만 해도 항상 105 사이즈를 입었던 터라 항상 105 사이즈만 구입하였는데, 최근 몸집이 약간 줄은 듯하여 100 사이즈에 과감히 도전해 보고자 샀던 옷이다. 막상 집에서 입었을 때의 느낌은 아직은 105 사이즈가 더 맞기도 한 것 같기도 하고, 오히려 몸에 착 달라붙어 활동성이 좋아진 것 같기도 하다.

 

 솔직히 잘 모르겠다. 과감한 색깔과 한치수 줄인 사이즈. 두가지 도전을 한꺼번에 시도했던 터라 사무실에 처음으로 입고 가던 날 아침은 왠지 설렘과 두려움이 아주 조금은 마음에 일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정시에 도착하여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평소보다 더 큰 목소리로 나의 출근을 알렸고, 힘찬 목소리로 한 명 한 명에게 다가가 일일이 인사를 했다. 분명 누군가 나에게 오늘따라 웬일이냐며 관심을 가져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일부러 한 행동인데, 모두들 평소와 다름없이 지나가는 투로 인사를 받았을 뿐, 아무도 나의 밝은 인사뿐 아니라 입고 있던 노오란색의 카디건에는 쌀 한 톨의 작은 관심조차 없었다.

 

 심지어 평소에 직원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고 다니며 이러쿵 저러쿵 감나라 배나라 하는 지점장님조차 무슨 재밌는 것을 보는지 모니터에서 시선을 고정시킨 채 자리에 미동조차 없이 킥킥거리고만 있었다. 그렇게 허무하게 나의 새 옷 신고식이 막을 내렸던 터라 이 옷을 구매하길 잘한 것인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누군가 옷 이쁜데? 옷이 날개네와 같은 입에 발린 소리 단 한마디라도 해줬더라면 좋았겠다.라는 아쉬움이 계속 가슴을 짓누르고 있다. 

 열댓명 근무하는 작은 사무실이라 여태껏 서로 부딪쳐 왔던 그 시간들이면, 얼굴 표정만 봐도 똥이 마려운 것인지, 배가 고픈 것인지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실상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유독 남자 비율이 높은 것이 원인이라면 원인일 것이다. 열댓 명 중 단 한 명만이 생물학적 여성으로 판정을 받을 뿐, 실상은 직원 100%가 모두 남자라고 봐도 무방한 사무실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뭔가 석연치 않은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남자는 무뚝뚝하고, 여자는 섬세하다는 것은 보편적인 사항일 뿐, 모두가 그렇다는 절대적 기준은 아니기 때문에, 분명 누군가는 머리속으로라도 느꼈을 것이고, 또 좋다고 혹은 나쁘다고 생각한 사람이 1명 이상은 분명히 있었을 텐데, 그 누구도 나에게 카디건에 대해 말을 건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 카디건이 나에게 잘 어울리는지 어떤지는 알지 못한다. 

 이른 아침, 출근을 준비 할 무렵 어제의 일기예보가 떠 올랐다. 아니, 일기예보를 누군가에게 전화로 알려주었던 어느 20대 아가씨가 말하는 것을 전해 들었던 그 순간이 떠 올랐다. 오늘 날씨가 좋지 않겠구나. 생각에 항상 외근을 하는 나로서는 기분이 좋을 리가 만무했다. 왠지 하루 종일 업무가 하기 싫어질 것만 같은 그런 예감? 이대로 평범하게 하루를 시작한다면 그것은 왠지 소중한 나 자신에 대한 예의가 아닐 거란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그 길로 나는 비오는 날 옷이 금세 더러워지는 관계로 항상 편하게 착용했던 청바지를 버리고, 대신 얼마 전 카디건과 새로 샀던 베이지색의 면바지와 연회색 체크 셔츠, 그리고 노오란색의 카디건을 맞춰 입었다. 그러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저녁때 집에 들어오면 집사람은 미쳤다고 잔소리를 퍼 부울 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집을 빨리 나서고 싶은 마음은 들었으니 기분전환은 성공했었다. 

 

 하지만, 사무실에서는 이번에도 내가 무엇을 입고 출근했는지는 아무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비오는 날 어울리지 않을 노오란색의 카디건을 입은 나를, 나의 기분과 오늘 나를 만나게 될 사람들을 위하여 일부러 노오란색의 카디건과 과감한 베이지색 바지를 매칭함으로써 가을이 아닌, 봄의 기운을 전해주고자 입은 코디 방법이었지만, 동료들도 거래처 사장님들도 혹은 이동 중에 만난 행인들 중 단 한 사람조차 나에게 노오란색의 카디건이 잘 어울리는지 고급스러운지 너무 밝다든지 하는 식의 이야기를 전달해 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오늘 끝까지 가디건을 입고 있었다. 내심 혼자서 잘한 일이라고 칭찬해 주고 싶지만, 두 손 모두 키보드에 놓여 있는 상황이라 셀프칭찬은 다음으로 미뤄두기로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