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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글/감상평

감상평) #13. 무라카미 하루키, 자기란 무엇인가(혹은 맛있는 굴튀김 먹는 법)

by 바꿔33 2020. 2. 22.

 무라카미 하루키는 커다란 영향을 준 소설가이다. 어쩌면 지금 글을 쓰겠다며 아등바등 거리는 것 자체가 그의 소설을 읽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스무 살 무렵 읽었던 '상실의 시대(노르웨이의 숲)'를 시작으로, '1Q84', '해변의 카프카', '태엽 감는 새', '색채가 없는 다자키 스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잠' 등 모든 소설을 찾아 읽었고, '재즈 에세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이번 책인 '잡문집'까지 종류를 가리지 않고 그의 이야기를 읽고 있다.

 

 특히 이번 책 '무라카미 하루키의 잡문집'에는 지난 세월 끊임없이 나를 괴롭혀온 두가지 질문, "나는 누구인가? 왜 태어났을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까?"에 대한 해답과 "왜 글을 쓰려고 하는가? 무슨 글을 쓰려고 하는가?"에 대하여 작가가 쓴 글이 있어서 이를 소개하는 것으로 서평을 대신할까 한다. 

 

 누구나 한 번쯤은 고민을 하게 되는 이 질문들은 철학, 문학, 음악, 미술 등 다양한 장르에서 다양한 방법과 해설로서 우리들에게 해답을 주기위해 노력해 왔지만, 여전히 완벽한 이해는 어렵다. 이에 작가는 그동안 논의되어 오던 방법과 다른 설명으로 우리의 이해를 돕고 있는데, 다음에 적혀 있는 글을 읽고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자기란 무엇인가 혹은 맛있는 굴튀김 먹는 법

 

오바 다케시의 저서 <나라는 미궁>(센슈다이가쿠슛판코쿠, 2001년 4월 출간)의 '해설 비슷한 글'로 쓴 글입니다. 오버 씨는 철학자라고 할까 사색가로 (말하자면 매우 어려운 것을 생각하는 사람으로) 나 같은 사람이 넉살 좋게 나설 자리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뭐든 좋으니 써달라"는 부탁을 받고 이런 내용을 썼습니다. 오버 씨는 프린스턴 대학에 있을 때 알게 된 지인입니다. 

 

본문

 

 소설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나는 대체로 늘 이런 대답을 한다. "소설가란 많은 것을 관찰하고, 판단은 조금만 내리는 일을 생업으로 삼는 인간입니다"라고. 

 

 소설가는 왜 많은 것을 관찰해야만 할까? 많은 것을 올바로 관찰하지 않으면 많은 것을 올바로 묘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 가령 아마미의 검정토끼 관찰을 통해 볼링공을 묘사하는 경우라도. 그렇다면 판단은 왜 조금만 내릴까? 최종적인 판단을 내리는 쪽은 늘 독자이지 작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가의 역할은 마땅히 내려야 할 판단을 가장 매력적인 형태로 만들어서 독자에게 은근슬쩍(폭력적이라도 딱히 상관은 없지만) 건네주는 데 있다. 

 

 잘 아시겠지만, 소설가가(귀찮아서 혹은 단순히 자기 과시를 위해) 그 권리를 독자에게 넘기지 않고 자기가 직접 매사를 이래저래 판단하기 시작하면, 소설은 일단 따분해진다. 깊이가 사라지고 어휘가 자연스러운 빛을 잃어 이야기가 제대로 옴짝하지 못한다. 

 

 소설가가 좋은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해야 할 일을 지극히 간단히 말하자면, 결론을 준비하기보다는 그저 정성껏 계속해서 가설을 쌓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가설들을, 마치 잠든 고양이를 안아 들 때처럼, 살그머니 들어 올려(나는 '가설'이라는 말을 쓸 때마다 늘 곤히 자는 고양이들의 모습을 떠올린다. 따스하고 보드랍고 포슬포슬한, 의식이 없는 고양이) 이야기라는 아담한 광장 한가운데에 하나씩 하나씩 쌓아 올린다. 얼마나 유효하고 올바르게 고양이 = 가설을 가려내어, 얼마나 자연스럽고 솜씨 좋게 쌓을 수 있는가, 그것이 바로 소설가의 역량이 된다. 

 

 독자는 그 가설의 집적을 - 물론 그 이야기가 마음에 들었을 때 얘기지만 - 일단 자기 안에 받아들이고, 자기 질서에 따라 다시 한번 개인적으로 알기 쉬운 형태로 배열한다. 대부분의 경우 그 작업은 거의 무의식중에 자동적으로 행해진다. 내가 말하는 '판단'이란 결국은 그 개인적인 배열 작업을 가리킨다. 그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정신 조성의 패턴을 재조합하는 샘플이기도 하다. 그리고 독자는 그런 샘플링 작업을 통해서 살아가는 행위에 포함된 운동성 = 다이너미즘을 내 일처럼 리얼하게 '체험'하게 된다. 그렇다면 왜 굳이 그런 일을 해야만 할까? '정신 조성의 패턴'을 실제로 다시 짜는 일은 인생에서 몇 번이고 가능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픽션을 통해 일단 시험적으로나 가상적으로 그러한 샘플링을 실행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소설이란 사용된 소재 하나하나를 살펴보면, 허구 = 의사지만, 그에 뒤따르는 개인적 질서와 배열 작업의 과정을 보면, 명백하게 실제적인 것이다(그래야만 한다). 우리 소설가가 철저하게 허구에 구애되는 까닭은 대부분의 경우, 분명 허구 속에서만 가설을 유효하고 콤팩트 하게 쌓아 올릴 수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픽션이라는 장치에 정통해야만 고양이들이 곤히 잘 수 있는 것이다. 

 

 이따금 젊은 독자에게 긴 편지를 받는다. 그들 대부분은 진지하게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내가 생각하는 것을 어떻게 그렇게 생생하고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나이 차도 크고, 지금껏 축적한 경험도 전혀 다를 텐데"라고.

 

 나는 대답한다. "그것은 내가 당신의 생각을 정확히 이해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나는 당신을 모르고, 그러니 당연히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혹여 내가 당신의 마음을 이해했다고 느꼈다면 그것은 당신이 나의 이야기를 당신 안에 유효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라고.

 

 가설의 행방을 결정하는 주체는 독자이지 작가가 아니다. 이야기는 바람과 같다. 흔들리는 것이 있어야 비로소 눈에 보인다. 

 

 '자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소설가에게는 - 아니, 그렇다기보다 적어도 나에게는 - 거의 의미가 없다. 그것은 소설가에게 너무도 자명한 물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다른 종합적 형태로(즉, 이야기의 형태로) 치환해나가는 일을 일상적 업으로 삼고 있다. 그 작업은 지극히 자연적으로, 본능적으로 이루어지므로 질문 자체를 구태여 생각할 필요도 없고, 생각한다 해도 거의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 오히려 방해가 된다. 혹시 '자기란 무엇인가?'를 장기간에 걸쳐 진지하게 골똘히 생각하는 작가가 있다면, 그/그녀는 본래적인 작가는 아니다. 어쩌면 그/그녀가 뛰어난 소설을 몇 권쯤 쓸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본래적인 의미의 소설가는 아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얼마 전에 이메일로 독자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다. 정확한 문장은 기억나지 않으니 대략적인 내용만 쓴다. 

 

 며칠 전에 취직 시험을 받는데, 그때 '원고지 4매 이내로 자기 자신에 관해 설명하시오'라는 문제가 나왔습니다. 저는 도저히 원고지 4매로 저 자신을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그건 불가능하지 않나요. 혹시 그런 문제를 받는다면, 무라카미 씨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프로작가는 그런 글도 술술 쓰시나요?

 

 그에 대한 나의 답변은 다음과 같다. 

 

 안녕하세요. 

 

 원고지 4매 이내로 자기 자신을 설명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죠.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제 생각에 그건 굳이 따지자면 의미 없는 설문입니다. 다만 자기 자신에 관해 쓰는 것은 불가능하더라도, 예를 들어 굴튀김에 관해 원고지 4매 이내로 쓰는 일은 가능하겠죠. 그렇다면 굴튀김에 관해 써보시는 건 어떨까요. 당신이 굴튀김에 관한 글을 쓰면, 당신과 굴튀김의 상관관계나 거리감이 자동적으로 표현되게 마련입니다. 그것은 다시 말해, 끝가지 파고들면 당신 자신에 관해 쓰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이른바 나의 '굴튀김 이론'입니다. 다음에 자기 자신에 관해 쓰라고 하면, 시험 삼아 굴튀김에 관해 써보십시오. 물론 굴튀김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민스 커틀릿이든 새우 크로켓이든 상관없습니다. 도요타 코롤라든 아오야마 거리든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든 뭐든 좋습니다. 내가 굴튀김을 좋아해서 일단 그렇게 말한 것뿐입니다. 건투를 빕니다. 

 

 그렇다, 소설가란 이 세상의 굴튀김에 관해 어디까지나 상세하게 써나가는 인간을 가리킨다. 자기란 뭘까? 하고 생각하자마자(그런 것을 생각할 틈도 없이), 우리는 굴튀김이나 민스 커틀릿이나 새우 크로켓에 관한 글을 써나간다. 그리고 그런 사상,사물과 자기 자신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와 방향을 데이터로 축적해간다. 많은 것을 관찰하고 판단은 조금만 내린다. 그것이 내가 말하는 '가설'의 대략적인 의미다. 그렇게 해서 그 가설들이 - 층층이 쌓인 고양이들이 - 열기를 띠고, 그렇게 하면 이야기라는 비이클(탈것)이 자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진정한 자기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그 논리적인 왜곡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젊은이들을 옴진리교(또는 다른 컬트 종교)로 끌어들이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는 것은 오바 다케시 씨가 이 책에서도 자주 지적하고 있다. 나는 <약속된 장소에서>라는 책을 쓰면서 옴진리교 신자 몇 사람과 장시간에 걸쳐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대체로 그 지적이 옳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들 대부분은 자기라는 존재의 '본래적 실체'란 무엇인가 하는, 출구가 보이지 않는 사고의 트랙에 깊숙이 바져들어 현실세계(임시로 '현실 A'라고 하자)와의 물리적인 접촉을 조금씩 줄여나갔다. 인간은 자기를 상대화하기 위해 피와 살을 가진 몇 가지 가설을 통과해야만 한다. 마치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에서 타미노 왕자와 파미나 공주가 물과 불의 시련을 헤쳐나가면서(은유적인 죽음을 경험하고, 라도 말해도 좋을지 모르겠다) 사랑과 정의 보편성을 이해하고 그것을 통해 자기에 해당하는 포지션의 실상을 인식해가듯이. 

 

 그러나 실제로 지금 우리를 에워싼 현실은 각종 정보와 선택지로 넘쳐나 그 가운데 자기에게 유효한 가설을 적절히 골라내어 받아들이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그것들을 무제한으로 무질서하게 체내에 받아들여 자가 중독을 일으키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면, 그/그녀를 이끌어줄 경험이 풍부한 연장자는 눈에 띄지 않는다. 시간에 따라 현실이 변하는 속도가 너무도 빨라서 선행한 세대가 축적한 경험이 샘플로서 유효하지 못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거기에 이따금 강력한 외부자가 나타난다. 그 외부자는 몇 가지 가설을 알기 쉬운 세트메뉴로 만들어 그들에게 건네준다. 거기에는 필요한 모든 것들이 깔끔한 패키지로 완비되어 있다. 지금까지 혼란스럽던 '현실A'는 온갖 제약과 부대조건과 모순을 떨쳐버리고 더 단순하고 '클린'한 다른 '현실 B'로 바뀐다 그곳에는 선택지의 수가 한정되고, 모든 질문에 논리 정연한 해답이 마련된다. 상대성은 밀려나고 절대성이 그 자리를 꿰찮다. 그 새로운 현실에서는 그/그녀가 맡은 역할이 더없이 명확하게 드러나며, 해야 할 일이 상세한 일정표로 준비된다. 노력은 필요하지만, 그 달성 수준은 숫자로 계측되고 도표로 그려진다. '현실 B'에 있는 자기는, '프리 자기'와 '포스트 자기' 사이에 끼어버리기 때문에 정당한 존재 의미와 전후 성을 획득한 자기이며, 그 이외의 무엇도 아니다. 매우 이해하기 쉽다. 그 이상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리고 그 새로운 현실을 손에 넣기 위해 그/그녀가 상대에게 내놓아야 하는 것은 과거의 현실뿐이다. 그리고 과거의 진부한 현실 속에서 늘 허둥대며 고투했던 볼썽사나운 자아뿐이다. "달려 나가요"라고 외부자는 말한다. "네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은 오래된 대지에서 뛰어나와 새로운 대지로 옮겨가는 것뿐이다."

 

 이와 같은 거래 자체는, 내 개인적인 의견을 말하면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소설가는 때에 따라 그것과 똑같은 일을 한다. 우리는 이야기라는 장치를 통해 그것을 실행한다. "뛰어요"라고 우리는 말한다. 그리고 독자를 이야기라는 현실 밖의 시스템으로 끌어 들인다. 환상을 강요한다. 떨쳐 일어나게 하고, 두려움에 떨게 하고, 눈물을 흘리게 한다. 새로운 숲 속으로 몰아넣는다. 단단한 벽을 빠져나가게 한다. 자연스럽지 않은 일을 자연스럽게 여기게 한다. 일어날 리 없는 일을 일어났다고 믿게 한다. 

 

 그러나 이야기가 끝나면 가설은 기본적으로 제 역할을 마친다. 막이 내리고 조명이 켜지고, 포개어 있던 고야이들은 눈을 뜨고 기지개를 켜며 꿈에서 깨어난다. 독자는 그 기억을 부분적으로만 간직할 뿐 원래 있던 현실로 되돌아간다. 경우에 따라 예전과 얼마간 빛깔이 달라졌을지도 모르지만, 거기에 존재하는 것은 변함없이 낯익은 현실이다. 그 계속성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시 말해, 그 이야기는 열려 있다. 최면술사는 적당한 시기가 오면 손뼉을 쳐서 피험자의 잠을 깨운다. 

 

 그러나 개인으로 아사하라 쇼코가, 조직으로 옴진리교가, 수 많은 젊은이들에게 한 일은 그들의 이야기의 테두리를 완전히 닫아버린 것이다. 두툼한 문에 자물쇠를 채우고 그 열쇠를 창밖으로 던져버린 것이다. '진정한 자기란 무엇인가?'라는 물음 자체가 초래하는 폐쇄성을 한층 더 큰, 더 견고한 폐쇄성으로 바꿔놓았을 뿐이다. 

 

 계속성의 단절 - 그것이 분명 키포인트다. 계속성을 끊어내는 것으로(혹은 계속성을 무기한 위장해놓는 것으로) 현실은 언뜻 제대로 정합성을 갖춘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속성이라는 조금은 비루하지만 필요 불가결한 공기구멍이 인위적으로 막혀버리면 좋든 싫든 내부는 산소 부족 상태로 치닫는다.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위험하고, 실제로 비참하기 이를 데 없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옴진리교는 아니지만, 예전에 어느 유명한 컬트 종교에 빠진 경험이 있는 남자에게서 편지를 받은 적이 있다. 그는 컬트 수행장(같은 곳)으로 들어가 외부와는 철저히 차단된 생활을 했다. 경전 이외의 책은 엄격하게 금지되었다(그들은 신자가 픽션을 접하는 것을 일절 허하지 않는다. 신자에게 허락되는 허구의 채널은 단 하나이다.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는 내가 쓴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라는 소설을 짐 꾸러미 바닥에 몰래 숨기고 들어가서 남의눈을 피해 날마다 조금씩 읽어나갔다. 그리고 오랜 시간 이런저런 힘든 과정을 거쳐 가까스로 그 컬트의 정신적 속박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지금은 션실로 복귀해 평범하게 생활하고 있다. 왜 매일같이 매달리듯 그 소설을 읽었는지, 왜 그들이 시키는 대로 그 책을 버리지 않았는지, 그 이유는 그도 잘 설명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혹시 그 책을 계속 읽지 않았다면, 과연 그곳에서 제대로 빠져나올 수 있었을지 어땠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것은 소설가인 나에게 대단히 의미 있는 편지였다. 나의 고양이들은 나름대로 선명한 꿈을 꾸고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내가 쓴 소설이 뛰어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특정한 경우에 그것이 어떤 특정한 유효성을 가질 수 있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나는 소설가로서 그 사실이 기쁘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이야기라는 장치를 둘러싼, 지난하고 힘겨운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들 = 컬트는 단순하고 직접적이며 명쾌한 형식을 가진 강력한 이야기를 마련하고, 그 서킷으로 사람들을 꾀어들이고 끌어넣으려 한다. 그것은 유효성이라는 점에서는, 대단히 유효한 가설이다. 거기에는 불순물이 거의 끼어들지 않는다. 이론에 이의를 제기하는 요인은 조개를 해감하듯 애초부터 말끔하고 교묘하게 배제되었다. 논리는 나름대로 일관되게 통한다. 망설일 것도 고민할 것도 없다. 그곳에서는 모든 의문이 해소된다. 혹시 풀리지 않는 것이 있다면, 해소하려는 노력이 부족한 탓이다. 자, 좀 더 노력하십시오, 라는 과제가 주어진다. 노력은 정당하게 보상받는다. 닫힌 테두리는 닫힌 채로 있기 때문에, 불필요한 것들은 배제했기 때문에 강력한 즉효를 보인다. 

 

 그에 비해 우리 소설가들이 제공할 수 있는 이야기는 대수롭지 않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양한 형태와 다양한 크기의 신발들을 준비하고, 거기게 실제로 번갈아 발을 넣어보게 할 뿐이다. 시간이 걸리고 품이 든다. 발에 꼭 맞는 신발을 끝까지 못 찾을 수도 있다. 결과를 확신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겉보기에도 유효성이 결여되어 있다. 그렇게 성가신 일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물어도 할 말이 없다. 명쾌한 대답은 없다. "분명 뭔가가 있을 것 같은 기분은 드는데"라고 우물우물 말끝을 흐릴 수밖에 없다. 

 무언가.

 

 그러나 그들에게는 없지만 우리에게는 있는 것도 있다. 많지는 않아도 조금은 있다. 그것은 앞에서도 언급한 계속성이다. 우리는 '문학'이라는, 오랜 시간에 걸쳐 실증된 영역에서 일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살펴봐도 알 수 있지만, 문학은 대부분의 경우 현실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일례로 전쟁이나 학살이나 사기나 편견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제지하지는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은 무력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역사적인 즉효성은 거의 없다. 그러나 적어도 문학은 전쟁이나 학살이나 사기나 편견을 만들어내지는 않았다. 거꾸로 그런 것들에 대항하는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위해 지치지 않고 꾸준한 노력을 계속해왔다. 물론 거기에는 시행착오가 있고, 자기모순이 있고, 내분이 있고, 이단이나 탈선도 있었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문학은 인간 존재의 존엄의 핵을 희구해왔다. 문학이라는 것 안에는 그렇게 계속성 안에서(그 안에서만) 언급되어야 할 강력한 특질이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 강력함은 예컨대 발자크의 강인함이며, 톨스토이의 광대함이며, 도스토옙스키의 심오함이며, 호메로스의 풍부한 비전이며, 우에다 아키나리의 투철한 아름다움이다. 우리가 쓰는 픽션은 - 번번이 호메로스를 언급하자니 면목이 없지만 - 그때부터 끊임없이 계속해서 흘러온 전통 위에 성립한다. 나는 소설가로서 주의가 고요히 가라앉은 시각에 그 흐르는 소리를 어렴풋이 들을 때가 있다. 나는 물론 이렇다 할 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니다.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이 세상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내가 지금 해나가는 것은 예로부터 면면히 이어져온 더없이 소중한 무엇이며, 틀림없이 앞으로도 이어져나가리라고 나는 느낀다. 

 

 이야기는 마술이다. 판타지 소설풍으로 말하자면, 소설가는 그것을 이를테면 '백마술'로 사용한다. 일부 컬트는 그것을 '흑마술'로 사용한다. 우리는 깊은 숲속에서 격렬하게 칼날을 부딪치며 남몰래 겨룬다. 흡사 스티븐 킹이 쓴 청소년 소설의 한 장면 같기도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그 이미지는 진실에 상당히 근접해 있을게 틀림없다. 왜냐하면 이야기가 가지는 큰 힘과 그 이면에 감춰진 위험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소설가이기 때문이다. 계속성이란 도의성의 영역이기도 하다. 그리고 도의성이란 공정한 정신을 의미한다. 

 

 '진정한 자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돌아가자. 

 

 진정한 나란 무엇일까?

 

 굴튀김에 관해 (원고지 4매 이내로) 얘기해보자. 아래의 글은 이야기의 본래 줄거리와는 관계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느 굴튀김이라는 것을 잘 풀어서, 나 자신을 얘기하고 싶다. 데카르트나 파스칼이 그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전혀 알 수 없지만, 나에게는 '굴튀김에 관해 이야기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가 성립한다. 그리고 그 망막한 길을 헤쳐 나가다 보면, 분명 어딘가에서 나 나름의 계속성이나 도의성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예감까지 든다. 아니, 그런 것을 실제로 찾으려 들지는 않는다. 찾는다고 해도 내게는 거의 쓸모없을 테니까. 그래도 그것이 어딘가에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게 느끼고 싶다. 굴튀김에 관한 글을 쓰는 것으로.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간단히 말해 이렇다. 나의 테두리는 열려있다. 뻐끔 열려 있다. 나는 그곳으로 세상의 굴튀김과 민스 커틀릿과 새우 크로켓과 지하철 긴자선과 미쓰비시 볼펜을 잇달아 받아들인다. 물질로, 피와 살로, 개념으로, 가설로. 그리고 나는 것들을 활용해 개인적인 통신장치를 만들어가고자 노력한다. 마지 'E.T'가 주변에 널린 잡동사니를 조립해서 행성 간의 통신장치를 만들어낸 것처럼. 뭐든 좋다. 뭐든 좋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하다. 내게는. 진정한 내게는. 

 

 "굴튀김 이야기"

 

 추운 겨울날의 해질녘에 나는 단골 레스토랑에 가서 맥주(삿포로 중간 병)와 굴튀김을 주문한다. 그 가게에는 다섯 개짜리 굴튀김과 여덟 개짜리 굴튀김, 이렇게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정말 친절하다. 굴튀김을 많이 먹고 싶은 사람에게는 굴튀김 큰 접시를 내어준다. 조금만 먹어도 되는 사람에게는 굴튀김 작은 접시를 내어준다. 나는 물론 여덟 개짜리 굴튀김을 주문한다. 오늘 나는 굴튀김을 배불리 먹고 싶으니까. 

 

 굴튀김에는 잘게 채 썬 양배추가 푸짐하게 곁들여 나온다. 달착지근하고 신선한 양배추다. 원하면 추가로 주문할 수도 있다. 추가 요금은 오십 엔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는다. 나는 정말로 굴튀김 그것이 먹고 싶어서이지 곁들여 나오는 양배추를 먹으로 온 게 아니니까. 처음에 수북이 담아준 양만으로도 충분하다. 내 접시 위의 튀김옷에서 아직도 지글지글 소리가 난다. 작지만 아주 멋진 소리다. 내가 보는 앞에서 주방장이 막 튀겨냈다. 큼지막한 기름 냄비에서 내가 앉은 카운터 자리까지 옮기는데 불과 오 초도 걸리지 않았다. 어떤 경우에는 - 예를 들어 싸늘한 해 질 녘에 갓 튀긴 굴튀김을 먹는 경우에는 - 속도는 큰 의미를 가진다. 

 

 젓가락으로 그 튀김옷을 둘로 툭 자르면 그 안에 굴이 여전히 굴로 존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겉보기에도 굴이고, 굴 이외에 그 무엇도 아니다. 빛깔도 굴이요, 형태도 굴이다. 그것들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느 깊은 바닷속에 있었다. 아무 말 없이 꼼짝도 않고, 밤낮도 없이 단단한 껍데게 속에서 굴다운 것을(아마도) 생각하며 지냈다. 그런데 지금은 내 접시 위에 있다. 나는 무엇보다 내가 굴이 아니고 소설가라는 사실이 기쁘다. 내가 일단 윤회전생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도 기쁘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다음 생에 굴이 될지도 모른다니,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다. 

 

 나는 그것을 차분하게 입으로 가져간다. 튀김옷과 굴이 내 입 안으로 들어간다. 바삭한 튀김옷을 씹을 때의 감촉과 부드러운 굴을 씹을 때의 감촉이 당연히 공존해야 할 식감으로 동시에 감지된다. 미묘하게 뒤섞인 향이 축복처럼 입 안에서 퍼져간다. 나는 지금 행복하다. 나는 굴튀김이 먹고 싶었고, 그리고 이렇게 여덟개짜리 굴튀김을 음미할 수 있으니까. 게다가 짬짬이 맥주까지 마실 수 있다. 그런 것은 한정된 행복에 불과하지 않느냐고 당신은 말할지 모른다. 그렇지만 최근에 내가 한정되지 않은 행복을 맛본 게 언제였을까? 그리고 그것은 정말로 한정되지 않은 것이었을까?

 

 나는 생각해본다. 그러나 결론은 좀처럼 나지 않는다. 다른 사람도 얽혀 있기 때문에 그리 간단히 결론지을 수는 없다. 굴튀김 안에서 무슨 힌트라도 찾을 수 있을까 싶어서 나는 한동안 남은 굴튀김 세 개를 골똘히 응시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나에게 아무 말도 건네지 않는다. 

 

 나는 이윽고 식사를 마치고, 마지막 남은 맥주 한 모금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온다. 역을 향해 걸어 갈 때, 나는 어깨 언저리에서 어렴풋하게 굴튀김의 조용한 격려를 느낀다. 그것은 결코 신기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나에게 굴튀김은 일종의 소중한 개인적 반영이니까. 그리고 숲 속 저 깊은 곳에서는 누군가가 싸우고 있으니까.